신이 아니어서, 사랑할 수 있었다

감정의 위계를 해체하며 평면을 말하다

by 삥이


<Ryuichi Sakamoto - Aqua>






삶을 살다 보면 묘한 장면 하나와 마주친다.



성공은 언제나 '적은 수'에서 태어나지만,

그 적은 수는 누구보다 많은 무게를 짊어진다는 장면.


마치 상위 1%가 나라의 절반 가까운 세금을 감당하듯,


공부도, 운동도, 일도, 연애도,

결국엔 가장 많은 걸 품는 사람은 언제나 극소수다.


고등학교 교실,

대학교 동아리실,

프로스포츠팀의 훈련장,

어느 기업의 사무실 안,

그리고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제일 빛나 보이는 이들이,

외려 가장 늦게까지 남아,

가장 무겁게 살아낸다.


그리고 우린 그걸 '당연하다'라고 부른다.








그렇더라.



세상은 결국,

아는 만큼만 보이고,

더 많이 아는 사람에게 끌려다니게 된다.


익숙한 말이다.

겉으로 보면 너무 당연해서 고개를 끄덕이기 쉽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하니까 1등이지 ㅋㅋㅋ"


어쩌면 아니,

'1등이니까 열심히 하는 거다.'


압도당하는 자리는,

가만히 있어도 무너지는 자리가 아니기에.



삶은 늘 불안하다.

똑똑하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돈 많다고 세상이 쉬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신(神)이 아니니까.

감정을 전지하는 존재가 못되니까.



그래서 외려,

우울하고,

외롭고,

두려워서

당신을 믿지 못하게 된다.


공감받지 못할 거란 예감 때문에 때로는 말을 아끼기도 한다.



그런데 침묵했을 때마저도,

어떤 사람들은 말할 수 있지.

"저 사람 입도 무거운 것 봐. 진중하네."



그런데 정작 그들도,

집에서는 "엄마 김치찌개 끓여주떼여"라고 말하고 있는 아이러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자기 안의 연약함을 누군가에겐 숨기고,

누군가에겐 거리낌 없이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항을 만든 건 내가 아닌데,

때론 당신들이 먼저 어항 속으로 들어오더라.


감정은, 그렇게

일방통행이 된다.



어느덧,

어장관리라는 범행을 저질렀다며 협박하더라지.







나 같은 작은 소년에게도,

징크스는 있다.


외출 전, 왼손엔 애플워치,

오른손 약지에는 반지를 끼운다.


그리고 속으로 읊조린다.

"후앙.. 삥이야 너는 오늘도 네가 설계한 세계를 살아볼 거야"


그리고,

차 시동을 켜거나

버스카드를 가방에 챙기거나

운동화 끈을 조인다.


셋 중 하나는 반드시 한다.

의미가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닌데,

계속하다 보니.. 의미가 되었..따..!




나 같은 허세 킹도

불안이라는 게 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거나,

무언가를 쓰고 싶을 때,


운동을 마친 직후에도,

술을 마시고 돌아온 밤에도,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릴 때조차,


나는 씻기 전에 메모장을 켠다.

그 순간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시 읽는다.

다시 읽으면 고쳐야 할 문장이 보인다.

윤문을 한다.


그러면, 어느새

그 땀은 말라 있고,

감정은 문장이 되어 있다.



나쁜 습관일지도 모르지.

나중에 연이 될 누군가가 혼낼지도 몰라.

"제발 씻고 해 ㅋㅋㅋㅋ"

(웅 알게또....)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다.

혹시라도 잊을까 봐.


아니, 잊기 싫어서.

기억하고 싶어서.

붙잡고 싶어서.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자연스레, 서방 사회의 문화와 역사, 철학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삶을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20년을 넘긴 듯싶다.



잉글리시 풋볼 리그가 처음 열린 1888-89 시즌,


제국주의의 여파 속에서 브라질에 축구를 전파한 찰스 밀러,


그리고 혼혈 선수로 인종차별을 견디며 살아낸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덕분에 브라질 국민은 어느 순간 '축구'를 감정의 언어로 품기 시작했다.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누군가는 '그깟 공놀이'라 여길지 몰라도,
축구는 정치, 귀족문화, 전쟁, 문학, 경제,

심지어 결혼까지 그 모든 것과 얽힌 복잡한 코드였다.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 당일,
경기 일정 하나가 투표율을 바꿔놓았고,


유러피언 슈퍼 리그를 만들겠다는

구단주들의 무지하고 오만한 선언 한 마디에
영국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단 24시간 만에 긴급 성명서를 냈다.


전 유럽의 구단들이 주식시장 동요를 막기 위해 공식 반대 의사를 냈고,


런던과 파리, 로마.

수천 명의 팬들이 '무기'처럼 감정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모든 일은,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전, 2020년대의 일이었다.





그렇다.

진심은 언제나 세상의 가장 깊은 진리 속에 숨어 있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설계해 둔 구조 속에서

점수를 받고, 등수를 나누며

'피지배층'처럼 살아가는 줄 알았지만



사실 진짜 '그사세'의 흑막들은,

진심을 가진 이들이 매우 치밀하게 설계한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혼자 그걸 이루지 않았다.




예를 들어,


모든 독일 연방 국민이

'황제(der kaiser)'라 부른 프란츠 베켄바워 곁엔

늘 조용히 머물던 기사,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가 있었고


네덜란드 왕국에선

빈센트 판고흐조차도 때론 잊힐 만큼

'축구하는 철학자' 요한 크라위프가 존경받고 있고,

그 곁은 언제나 요한 네이스컨스가 그림자처럼 함께였었다.



역사 속 위대한 이들의 곁엔 언제나

그들이 사랑한 조력자들이 있었다.


(좌) Franz Anton Beckenbauer / (우) Hans-Georg "Katsche" Schwarzenbeck
(좌) Hendrik Johannes Cruijff와 그의 아내 / (우) Johannes Jacobus Neeskens와 그의 아내



이렇듯,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도

누군가에겐 진심이 된다.


그리고 그 진심은,

때론 구조의 끝에서 <압도적 1등>이 되어버린 이들을

늦은 밤 사무실에 홀로 남게 만든다.





그게 바로, '변태성'이다.





여기서 변태성은,

감정의 위계 속에서 자신을 깎아내리고

상대를 우러러보며 생겨나는 짝사랑의 병증이 아니다.


그건 '헌신'마저 과시하는,

혹은 흑화해서 '감정의 폭력'을 행사하는

이상성욕자. 즉, 변태(變態)지.


즉,

"나는 안 되고, 너는 빛나니까.."

이런 구조에서 생기는 자격증명형 감정소비가 아니라는 말이다.




변태성이란

감정의 평면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열망하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쌍방향의 몰입성이다.



일방통행 말고, 양방통행.

감정의 일방적 행사 말고, 말의 티키타카.



그래서,

학문은 언제나 당신에게 열려있고,

당신의 마음도 열려 있다면, 그 진심은 언젠가 도착할지도 몰라.


이건

성경에서도,

붓다의 언어에서도

흔히 보이는 구절일 것이다.



여기까지

감정의 깊은 곳을 드릴로 건들다 보면

왜 법과 종교, 그리고 사랑과 학문이

서로를 논증하고


때로는 『논문』이라는 구조로 얽히게 되는지 어렴풋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그렇게 구조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조 속에서, 다시 사랑을 증명한다.







퀘스천(Question).

왜 어떤 사랑은 '이상성욕의 변태'로 흐르고,


왜 어떤 사랑은 '존경받는 연인'으로 끝나는가?





내 친구들은 되게 다양하다.



친구A

친구A: 얘들아 ㅜㅜ 00이 드디어 0000 합격했다ㅜㅜㅜ

친구들: 와 ㅋㅋㅋㅋ 축하한다

친구A: 너네들은 알겨 ㅋㅋㅋ 내가 진짜 2년 동안 먹여 살렸다

친구들: 알지, 00이도 너무 잘됐다. 너네 이제 결혼만 남았네 ㅋㅋㅋㅋ

친구A: 아 근데 00이 입사하자마자 내 연봉 2배임 ㅋㅋㅋㅋ (결혼) 안 할 수도 있겠다 싶네 ㅋㅋㅋㅋ


서로를 위해 살아온 시간,

그럼에도 상대가 더 잘됐을 때 비틀지 않고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온도.


아마 이들은 해피엔딩일 것이다.


(미리) 축하행♥




친구B

내 친구B는 한 업체의 사장이다.(엄빠의 힘)

친구B 여자친구도 집안이 탄탄한 곳이다.


근데 여기는 온도가 매우 다르다.

겉으로 보면 '을(乙)'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철저한 '갑(甲)'이다.


친구는 결혼 의지가 없다.

상대는 결혼을 원한다.

친구는 연애 경력도 거의 없어 아직 연애의 달콤함을 누리고 싶다.


"아마 100일이 기점이 될 것 같아."

그 말엔, 이미 내 친구의 눈에 다른 여인들이 담겨있다는 것을 의미했을지도.





친구C

친구C는 결혼했다.

그 와이프는 나도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아이.


친구C는 서울에서 IT회사 창업을 하며 꽤 컸고,

항상 밤을 새우며 나와 '와씨 공부 힘들다 ㅋㅋㅋㅋ 성호, 빨리 서울 올라와'라고 통화를 주고받던 사이.


어느 날은,

큰돈 좀 만지다 보니,

큰돈 좀 빚을 지게 되던 때가 있었고,

이때 친구 와이프가 큰돈 좀 빌려줘서 불을 꺼줬었지.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알콩달콩 잘 지낸다.

얘네는 어차피 빚 몇 푼 따위가 위기의 근원(源)조차 되지도 못했긴 해.






미안하다 얘들아.

내 브런치 53번째 작품 썰 주인공들이 되셨다.



아무튼 간,

중요한 것은

감정의 '위계'다.

이 위계라는 녀석은 어디서 오는 걸까.


돈?

지식?

감정의 농도?

가정 배경?

외적인 매력?

아니면 내적인 깊이?


에헤이~ 다 알면서~

하지만, 다 알면서도 잘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이더라.


감정이 평평하지 않으면,

한쪽은 권력이 되고

한쪽은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되더라지.


하지만 감정이 평면을 이룰 때,

어떤 때는 겉으로 '위계'가 있어 보여도

사실, 그 관계의 사람들은

결국엔, 닮은 결을 따라 같은 쪽으로 흘러간다.





어항 속 고기와,

어항을 들여다보는 관리인이 아니라,

같은 바다에서 함께 숨 쉬는 존재로서

서로를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일.



'위계'는 그렇게 생겨나고,

사랑은 그 위계를 초월할 때에야

비로소 같은 평면 위에서 존재하게 된다.



그렇지 싶다.

(아님 말고)







삥이's thinking.

평면 위의 그곳은 어떨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어느샌가 '신(神)'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다 문득,

신이 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거나,

연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다.


그렇게 사랑은

쉽게 뒤틀리고,

감정은 흔히 왜곡되기 시작한다.


이거 뭐,

지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왔다가 떠났다가,

마음 흔들고 정신없다.





하지만,

사실 사랑은,

우리가 서로를 신처럼 떠받드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같은 평면 위에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데에 있다.


베켄바워와 슈바르첸베크가 함께 수비했듯,

크라위프와 네이스컨스가 함께 리딩했듯이.





그 사람이

내 위에 있어도 되고,

내 아래에 있어도 되고,

옆에, 혹은 속에 있어도 되고,

어디든 괜찮다.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인 것이다.

상자 안 고양이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


관측하기 전까지는

'죽음'도 '생명'도 단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자연과학에서는

이걸 양자역학이라고 하더라지.



그 이론 중 하나,

관측자 효과(Observer Effect)에 따르면


관찰하는 순간,

입자의 상태는 바뀌게 되어 있다.


사랑도, 존재도,

결국 누군가가 '봐줄 때'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그제야 감정이 '하나'로 붕괴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보는 자가, 존재하게 한다"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통 논리(logic)나 알고리즘의 증명은

자판기처럼, 바둑처럼 그리고 블로그처럼,

누르면 나오고, 수를 두면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감정은,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감정은 늘,

'서로를 알고자 했던 그 모든 시간'의 합(合)으로

나중에서야 '성적표'처럼 보여줬었나 봐.


잘하면 A+,

못 하면 B~A,

안 하면.. 빼박 F.



근데,

성적을 낼 생각으로 감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긴 하지.









그렇게 보면

누군가의 신(神)이 되고 싶었던 것도,

결국은, 아주 오래된 마음의 작동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전부가 되고 싶고,

그 사람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던 마음.


하지만 감정은

전지전능할 수 없고,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결국 서로를 바라보는 '관측자'로 남을 뿐이다.




만일,

당신이 신이 되려 한다면

종교적 성찰 없이는,

집착과 광기를 품을지도 모르니까.


사랑은 설렘이고,

끝나면 옅어진다.


집착은 파괴고,

깊어지면 호러가 된다.


광기는 파멸이고,

미친 자는, 결국 폭력을 선택한다.



하지만,


사랑을 해 설렘을 느껴, 설렘이 옅어질 때쯤 집착을 한 자는 여운을 느끼고, 여운을 느끼던 자가 보호하겠노라 세상을 향해 광기 어린 시선을 쏘아붙일 때.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랑은,

그 사람의 우주를 '지켜보는 마음'에서 시작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부모님이,

그리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녕, 소중한 아이야"라고 안아주시던 그 마음처럼.



자꾸 생각나고,

자꾸 보고 싶고,

너무 감사한 분들 있잖아.










그래서,

우리는 신이 아니면서,

종종 신처럼 사랑하려다

결국 인간으로 남는 걸지도.


지켜보고,

바라보다가,

조용히 울어버린다.




그러니,

사랑할 땐,

신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사람처럼 옆에 있어주자.


변태성은,

그런 '같은 평면의 헌신'이니까.







어떤 이들은, 바다이되 서로를 가두지 않는다.




자,

여기까지

위계(位階)를 해체해 봤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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