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자아 성장기 (2015~2018)
K과장은 그의 아내가 해외 장기 파견을 대략 1년 가까이 나가 있었기에,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았다.
야근을 하지 않는 그였지만, 그렇다고 집에 바로 빨리 들어가기는 싫었다.
스스로 밥을 차리기는 귀찮고, 처가댁에 가서 함께 밥 먹기는 싫고, 처가댁이 아이 밥도 먹여줄 테니 매사 본인의 이점을 찾아다니는 그에게는 사내식당에서 적당히 주는 저녁을 먹는 것이 Best 옵션이었다.
그는 혼자 밥 먹을 줄 몰랐다. 혼자 먹는 자신의 모습을 초라하게 여기는 것인지, 하여간 마음에 드는 성향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6시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내 자리에 찾아온다.
"저녁 먹으러 가자."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나야 특별한 약속이나 일정이 있지 않은 이상 칼퇴를 하는 일이 손에 꼽았기 때문에 저녁은 먹어야 했고, 저녁의 상대가 영 별로였지만 이미 입사 후 1년을 넘게 버텨온 관계였기에 식사 자리야 감내할 수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싫어하는 마음을 심장 아래 어딘가에 깊이 숨겨 놓고, 겉으로는 웃음을 얼굴에 드러내며 대화할 수 있는 꽤나 능숙하게 회사 역할극을 잘 해내는 인간이었던 듯하다.
매일 그와의 저녁에서 나는 재밌는 소식과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라디오 역할을 해야 했다.
"재밌는 거 뭐 없냐?"
"아. 요새 비트코인 시장이~~~... ~~~"
"ㅋㅋ그러냐? 결혼 준비는 잘 돼 가냐? 그거 진짜 할 거야? 하지 말라니까 걔 아니야"
"많이 다퉈도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이 더 큽니다ㅎㅎ"
어느 날 저녁은 나도 그의 흥미를 끌 만한 소재가 딱히 없었고, 종일 업무에 시달려 지친 날이었는데, 라디오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털리고 말았다.
"야 뭐 재밌는 일 없냐?"
"아, 네.. 뭐가 없습니다."
"네 없습니다?? 이게 진짜 미쳤네?"
"왜 그러셔요.. 진짜 없어서 그렇습니다." "없어도 뭐라도 얘기해야 할 것 아니야. 없습니다?"
"제가 좀 더 준비해 보겠습니다."
나의 개인 일정으로 저녁 거절을 시도하면, 곧바로 다시 잡히거나 또는 다음날 치졸하게 업무로 공격한다.
A날의 경우이다.
"저녁 먹으러 가자."
"엇. 저 오늘 저녁 약속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며 정색하며 노려본다. 혈액순환이 진짜 잘 되는 놈이다.
"야. 그럼 미리 말해야 될 것 아니야. 너 저녁 약속 있다고."
"아 제가 일하다 깜박했습니다..."
"그냥 나랑 저녁 같이 먹고 다시 약속에 가"
"네...? 저 저녁 먹는 약속인데요..?"
"같이 앉아서 밥 조금만 먹으면 될 것 아니야. 그리고 나 밥 빨리 먹어."
"아.... 알겠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사내식당에서 딱 밥 세 숟갈만 먹는다. 아예 안 먹기에는 또 반항하는 모습이니 적당히 먹은 것이다.
B날의 저녁이다. 그날은 내가 가족들의 옷을 세탁소에 맡겨야 할 일일이 있었다. 집까지 가는 데에 대략 1시간이 소요되었고, 세탁소는 저녁 7시 30분이면 문을 닫았기에 어서 칼퇴를 해야 했다.
"지훈아 가자."
"아 저 오늘 가족이 부탁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합니다.."
"뭔 일 또, 무슨 일 해야 하는데?"
"세탁소에 얼른 옷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뭔 소리야 세탁소를 오늘만 하냐?"
"오늘 이것 못하면 많이 잔소리 듣습니다. 제가 하기로 했는데 해야죠.."
"내가 저녁 못 먹으면 미리 말하라 하지 않았냐?"
"아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못 드렸네요.."
솔직히 K과장에게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가 말하지 않았다. 이 새끼가 내가 매일 저녁을 함께 먹어주는 것이 디폴트 값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줘야 했다. 그래서 그날도 까먹은 척을 했다. 내가 변수라는 것을 이렇게나마 알려주기 위해서.
"빨리 내려가자 그럼 빨리 먹을 테니까."
"아 진짜로 세탁소 문 닫습니다. 지금 바로 가야 됩니다."
"와.. 진짜"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그의 표정을 보고 도저히 질문을 참을 수가 없다. 약간의 실소를 섞어 물어본다.
"그런데 과장님, 왜 혼자 못 드셔요? 그냥 드시면 되시지 않으셔요?"
"니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무슨 20대 초반 연애 다툼에서 여자가 할 법한 대사가 등장하여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랬다.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 조직이 원하는 틀에 나를 지나치게 깎고 성형하여 맞췄던 나의 잘못이다.
나는 그날 내 할 일을 하러 사내식당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출발했고, 다음날이 되자 오전부터 그가 쳐다도 안 보던 업무를 찾더니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야단을 쳤다.
나는 서서히 가스라이팅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K과장은 조직을 대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사람도 조직의 부품인 한낱 개인일 뿐이다.'
'조직은 나의 과도한 복종 정신에 대해 세밀하게 평가하고 모니터링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마음속에 숨기고 숨겨왔던 이 사람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너무 많이 자라나서 곧 몸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다음화에서는 그에게 반격했던 에피소드를 연재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