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자아 성장기 (2015~2018)
그 해 10월부터 나는 신입사원으로서 일하게 되었다.
나는 대기업을 처음 경험했기에 거대한 조직 시스템의 인사 관리/평가 기능에 대해 과대 평가할 수밖에 없는 어린 양이었다. 마치 조물주가 미물들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있듯이 조직이 언제나 나를 주시하고 판단할 것만 같았다.
일례로 인턴십을 시작했을 때 근무시간은 업무에 칼 같이 몰입해야 해야 하는 줄 알았기에, 아주 실없는 것도 사수에게 물어봤다.
"화장실 다녀와도 될까요?" -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 ㅋㅋ 그냥 가" - 실소를 터뜨리는 사수는 완전히 통제될 것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에 흡족해하는 듯하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여린 목을 보기 좋게 노출시키고 관계를 시작했던 나의 잘못도 있던 것 같다.
선배들한테는 아침에 처음 뵈었을 때 외에도 마주칠 때마다 매번 고개를 숙였고, 퇴근할 때에는 모든 선배들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들어갔다. 스스로도 좀 과한가 생각이 들었으나, '요즘 인턴들 인사성이 없던데..'라는 소문을 접하고 나서 적당한 선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듯 조직에게 납작 엎드려서 얼어 있는 (조직이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았을 텐데) 나의 모습은 K과장에게 정말 맛있는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회사생활 10년차로 일의 권태기가 오고 있을 그의 시기에 나라는 놈은 그의 삶을 자극시키는 흥미로운 신병이었고, 그의 가스라이팅에 나는 신속하게 침수되었다.
내가 배웠던 업무는 사업 주요 계약서 조항 정리와 시장동향 리서치였다. 해외 파트너사와의 합작법인 운영 계약서 및 주주계약서는 신입사원에게 성장하기 좋은 기회였으나, 난이도 있는 영역이다 보니 뭐가 중요한 요소인지 판단할 수 없었기에 매번 정리할 때마다 혼이 났다. 복잡한 조항 간의 연결을 숙지하고 있지 못하면 회의실에서 온갖 모독을 당했다. 하루하루 자존감은 무너져갔으나, 이렇게 내가 성장하는 거겠지 나의 마음을 애써 다잡는다. 그도 나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말해준다.
"너 지금 아무한테도 못 배우는 엄청 중요한 거 배우는 거다."
그래. 계약서 전문성을 함양하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계약서 구조와 연결 논리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나는 정리한 것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K과장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a조로 가봐. 그거 읽어 보면 돼."
"아 네. a 조 살펴보았는데,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이해를 잘 못했습니다. 혹시 b조 내용이랑 붙는 것은 아닐까요?"
"야. 너는 벌써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을 하면 네 하고 들어야지 반문하더라? 내가 xx대 나온 새끼들 아주 잘 알아. 꼭 지가 뭐 좀 아는 줄 알더라? 뭐도 모르면서?"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얼굴 근육에 아무리 힘을 줘도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왜 기분 x 같아?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말씀해 주신 것에 토 달지 않겠습니다."
"나 군대에서 조사관이었어. 사람 표정 읽는 것 전문적으로 배웠다."
나의 어깨와 허리는 점점 더 낮아지고 굽어갔다.
어느 날, 시장 동향을 분석하여 팀장에게 사수와 보고 드리는 자리였다.
밤새 해외 시장 리서치 기관의 복잡한 리포트를 정리하여 장표로 만들었고, 사수는 나에게 일을 내리고 매일 칼퇴하는 자였기에 큰 흐름만 소화하고 디테일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팀장이 이 리서치 기관의 유가 전망의 방법론이 무엇인지 물어보았고, 안 그래도 복잡한 개념이라 사수와 한참 보고 전에 논의했던 것인데, 그가 팀장에게 방향이 다르게 설명하였고,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곧바로 내가 정정해도 되는 것이 맞는지 분간이 안 서 고민하고 있는데 뭘 말하고 싶은 내 표정을 팀장이 읽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어요?" K과장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오류점을 하나 짚어주자 팀장이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가 분노에 차서 씩씩거리며 나를 부른다.
"야. 너 내가 병 x으로 보이냐?"
나도 표정관리가 안 되며 화가 올라온다. 그의 공격은 계속된다.
"내가 말한 것이 틀렸어? 니가 이렇다매. 어디가 잘못됐는지 다시 한번 니 입으로 말해봐."
옆 칸막이를 넘어 팀장님께 자신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듯이 목소리가 컸다.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이 소란을 어서 멈추고자 그가 원하는 리액션을 해 준다.
".. 설명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냥 부연 설명 드린 것입니다."
"근데 왜 부연설명을 그따위로 해. 내가 틀렸다는 것처~러~엄?"
"죄송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내리 갈굼 퍼포먼스였는데, 주변은 아무도 구출해 주지 않는다.
혼자 화를 삭이고 자리에 돌아갔다가 이내 폭발하여 맞붙을 것만 같아 바람을 쐬러 나간다. 이 시절 나는 흡연가였고, 담배에게 나의 심리 컨트롤을 깊게 의탁하고 있었기에 줄담배를 태우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마무리가 아쉬웠는지 자리에 돌아온 나에게 다시 찾아와, 조용히 속삭여준다.
"야.. 지금 인사팀장 xx팀장 알지? 나랑 같이 경력직으로 들어온 사람이야. 나랑 엄청 친해. 어디 한번 찔러봐. 어떻게 되나 보여줄게."
그가 여태껏 내게 행해온 많은 행태(관련 에피소드들을 앞으로 몇화 더 연재 계획이다.)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게다. 지레 겁을 먹어 '내 친구가 누구야'. '우리 아빠 누구야.' 스킬을 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조직의 최약자라는 가스라이팅에 이미 절어져 있었기도 하고, 이런 부조리를 인사팀에 신고하면 내가 K과장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언정, 나에게도 분명히 흠집이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개인 간의 갈등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조직이 원하는 인재상이리라. 임원면접 당시에 내게 주어졌던 질문도 '상사와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원만히 해결할래?'였었으니.
퇴근 시간이 되어 다시 나에게 온다.
"야, 저녁 같이 먹자"
"네 알겠습니다."
그는 저녁을 먹으면서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내내 정당화하면서 사과를 대신한다.
그가 내게 항상 애용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