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3) 가스라이팅의 대가

단단한 자아 성장기 (2015~2018)

by 아남과소년

친구의 스타트업에서 나온 뒤, 새롭게 시작된 직장생활은 모 가스 회사에서의 채용전환형 인턴십이었다.


인턴십을 얻어내는 것도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과정이었다. 촘촘하게 구성된 채용 프로세스에 온 영혼을 다해 임하였고, 겨우겨우 얻어낸 소중한 기회였다.

스타트업에서의 6개월 간 많이 배웠던 바였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를 조직에 설득시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의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가스라이팅의 대가 K과장을 바로 소개하고 싶지만, 잠시 열렬하고 피 튀겼던 채용과정의 기억들을 풀어보고 싶다.


채용절차는 1차 서류전형 - 2차 인적성 시험 - 3차 PT면접/토론면접 - 4차 인성 (임원면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차 관문은 다행히 넘어섰고, 본격 경쟁인 3~4차 면접에서 나는 운이 좋게 컨디션이 좋았다.


PT 면접은 전공 지식에 대한 문제가 주어지면 커다란 전지에 30분 내에 자유 양식으로 답변을 쓰고, 15분간 발표하는 것이다. 나는 면접관 앞에서 들통 날 아는 척은 하지 않으려 하되, 최대한 대학에서 배웠던 것을 15분 내에 꾹꾹 담아 표출하고자 혼신을 다해 설명하고 질의에 응답했다.

단시간의 몰입과 긴장으로 발표를 마치니 온몸이 젖어 있었다. 땀을 계속 닦아가며 성실하게 답을 드리려는 나의 모습에 면접관들의 얼굴에서는 점점 미소가 띠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용쓰고 있는 지원자가 귀엽다 또는 기특하다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발표를 완료하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인사팀 담당자가 내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에 젖은 강아지 모습 같았나 보다. 연속적인 그들의 웃음을 보고, 좋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희망에 부풀어 기다렸고, 일주일 후 4차 임원 면접 일정 통지를 받았다.


임원면접에서도 운이 좋았다. 지원부서 임원은 나의 삶에 대해 덤덤이 풀어가는 내러티브를 들으시더니, '서른 즈음에' 노래가 생각이 난다며 아냐고 물으셨다. 나는 1초의 공백도 없이 당차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의 18번 곡입니다!"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은 지원자의 모습에 담당 임원이 껄껄대기 시작했고, 옆자리에서 냉정한 표정으로 그리고, 고고하게 안경테를 만지며 끊임없이 나를 분석하시던 HR 임원도 결국엔 모든 치아를 개방한다.


몇 주 후, 인턴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나는 커다란 감격에 찼다. 당시의 여자친구이자 현 아내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부터 가스라이팅의 대가 K과장을 소개하겠다.

K과장은 인턴 때부터 나의 사수였다.

그는 매우 정치적이고(정치 역량이 얄팍하다.), 타인의 성과물을 자신의 것으로 세심하게 바꿔치기하는 데 능력이 뛰어났으며, 후배들에 피드백을 줄 때에는 밀실에서 군대 신병을 갈굴 때 사용하는 수려한 스킬들을 보유했다.

자신을 갈아 바칠 준비가 된 나의 포지션과 성향은 그에게 아주 싱싱한 먹잇감이었고, 이제 막 태어나 다리를 가누지도 못하는 어린양은 그에게 가스라이팅 되기 시작했다.


인턴십은 2달 동안 주제를 정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뒤, 여러 조직을 모시고 발표를 한다. 그 발표가 정규직 전환으로의 최종 평가이다.

K과장은 내게 유명 시장분석 기관의 동남아 가스전 분석 영문 리포트 한 뭉치를 주며, 읽고 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하였고, 매일 철야로 남아 처음 보는 용어들과 개념들을 찾아가며 공부하였다. 모르는 것은 다음날 K과장이 편해 보이는 시간에 자리로 찾아가 질의했는데, 뭣도 모르는 인턴의 질의가 지속되다 보니 대답 톤의 본색이 실리기 시작했다.


"하... 제대로 읽은 거 맞아? 내가 찾아본다?"

그의 옆에 서기만 하면 나의 몸과 뇌는 얼어붙는다.

"너 여기 이 문장 봤어? 이거 해석해 봤어?" 손가락으로 짚으며 쏘아본다.

"아. 네.. 봤습니다."

"여기 문장에 다 쓰여 있잖아. 지금 문장 독해해서 나한테 말해봐. 문법 다 배우지 않았냐? ㅋㅋ"


나는 K과장 앞에 서는 것이 무서웠기에, 질문은 가장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고 혼자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집에는 언제나 10시에 갔다.

보고 장표 피드백도 매서웠다. 형식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장표 작성의 기본을 짚어주는 피드백이었으나, 상대가 준 모욕감에 마음속에는 반발감이 일었다.

"야. 앞줄이 안 맞잖아. 기본 좀 맞출래? 이러면 아무도 안 읽어"

"하.. 여기 Font 사이즈 왜 틀려?"

"도대체 뭔 말하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2달간의 하드 트레이닝을 받고 작성된 철야 보고서는 (철야는 나만의 몫이었다.) 인턴치고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고, 드디어 최종 발표 시간이 찾아왔다. 발표 스토리를 외워버린 나는 지난 임원면접 때의 컨디션으로 여유 있게 스피치 했고, 좌중들의 반응도 집중하는 듯했다.


한 달 후 정규직 전환 합격 통지를 받았다. 나는 기쁜 소식을 가족들에 전하며 한껏 축하를 받고, 그날밤 두 다리를 뻗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

인턴 채용전환은 다음 해 1월부터 공채입사로 정식으로 일할 수 있는데, 본인이 조직과 조율하여 희망한다면 조기 입사도 가능하였다. 그러나, 쉼 없이 달려왔던 나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기에, 다음 해 입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K 과장의 전화가 왔다.

"너 내가 다 키워줬더니, 어디 딴 데 가는 거 아니지? 10월부터 나와. 일 많으니까"

"아.. 네 여행 갈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대한 빨리 복귀하겠습니다. (둘러대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거 불안하게 하네. 돈을 모아야지 무슨 여행이야"


그 후로도 여러 번의 재촉 연락에 나는 10월에 조기입사하였다.

그의 가스라이팅은 정규직 입사 후 더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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