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1) 박싱 in 항공 컨테이너

단단한 자아 성장기 (2015~2018)

by 아남과소년

엄마와 헤어진 후로, 할머니, 고모와 함께 살았던 나의 삶은 가장 안전하면서 주변으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았던 행복한 시절이다.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은 나를 온돌처럼 항상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나의 고모는 엄마가 돼주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예쁨을 받는 편이었다.

이렇게 학창 시절에 단단하게 자리 잡혔던 자존감과 자긍심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위태롭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던 나의 자존감은 깎이는 만큼 우울함으로 교체되었다.


이번 화부터는 사회생활 에피소드를 연재하겠다.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어 나는 들이닥친 취업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나의 진로는 무엇인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대학원 진학이냐, 회사에 취업하느냐, 전문직 고시를 준비하냐 정답을 내릴 수 없는 여러 고민들이 교차했다.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이냐를 이 옵션들 중에서는 명확하게 저울질하기 어려웠기에 머릿속에 의미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고민은 심히 비효율적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적성과 성향의 종합체인지 세밀하게 바라보고 대화 나눌 줄 몰랐던 20대 중반의 청년은 우유부단했다.


그때, 아주 솔깃하고 유니크한 제안이 주어진다.

초등학교 친구가 자신의 스타트업에 합류하라는 것이다.

마침 나도 대학에서 1년 간 창업동아리 활동을 통해 나름의 추진력과 영업력을 인정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더 느낌 있는 옵션으로 다가왔다.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 여러 해 같은 반을 하고, 축구부에서 함께 운동장을 뛰었으며, 영어 그룹 과외도 같이 했던 과거의 절친이었고,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사업은 한국에서 한창 성행하였던 해외 직구 '구매대행' 유통사업이었고, 동업자와 극초기에 진입하여 큰 돈을 벌었다 한다. (해당 수익으로 국내 웹서비스 업체 지분투자를 하여 부사장 타이틀도 보유했었다.) 그러나, 소비자의 구매 취소 시 발생하는 유통업자 부담 Risk로 '배송대행'으로 모델을 바꾸었고 그것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었다.

사업의 차별성은 USPS (미국 우체국) 유통망을 한국에서 유일하게 제휴되어 있어, 어떤 국내 배송대행 유통 사업자보다 값싼 배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한다.

왜 이 작은 스타트업만 제휴되어 있냐 물으니 아버지가 미국에서 목사님이시라 연결된 네트워크라 한다.


나는 원체 의심이 많아 객관적 검증을 내 눈으로 하지 못하면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나, 기사님이 운전해 주는 에쿠스에서 내리며, 젊은 임원 스타일의 착장은 친구의 성공 스토리를 그럴듯하게 만들었다.

또, 오랜만에 만난 성공했다는 친구에게

"진짜야? 어디 계좌 한번 보자"라는 저렴한 검증 절차를 시도하여 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친구와의 관계를 섭불리 종결시켜서는 안 되었다.


결국, 그래 일단 부딪혀 보자 결심을 내렸고

나는 시작부터 과감하게 김칫국 원샷을 때린다!


스타트업이 잘 되면, 친구인 나에게 특별한 대우가 있겠지? 스톡옵션을 크게 주려나? 못해도 C-level 자리라도 주겠지? 확답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허황된 희망이 시작의 동기였다.


내가 합류 결정을 내리자, Operation을 담당하는 40대 중반 공동 사장님이 (친구는 Sales 공동사장이었다.) 나에게 적절한 월급 수준이라며 180원 만원을 제시한다. "지훈 씨가 좋은 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이 쪽 경험이 없으면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어요"

그냥 아직 안정적인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해 많이 못 준다 하면 될 것을 굳이 나의 수준을 격하시킴으로써 보수의 수준을 정당화시킨다.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으나 당장의 처우가 중요하지 않았기에 4대 보험은 안 받겠으니 20만 원이라도 올리는 것에 합의를 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수행 업무는 다음과 같다.

- 3~4일은 인천공항 근처 대형 물류 창고에서 현장 Boxing 작업

-1~2일은 재택으로 상품 데이터 엑셀 작업 및 배송 서비스 확장 위한 영업 겸 협업


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입했던 물류 창고에서의 2~3명이서 했던 일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미국에서 한국에 주문하여 창고에 도착한 1,000개가량의 물품들을 미국 주 별로 구분하고 구분이 완료되면 다시 규격화된 박스에 최대한 빈 공간이 없도록 집어넣는다. 만약 박스 내부에 공간이 남는다면 규격화된 박스 자체를 가위질하여 크기를 줄이고 테이핑 한 뒤 무게를 잰다.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은 5 각형 항공 컨테이너에 이 모든 박스를 어떻게든 채워 넣는 것이 매일의 목표이다. 5 각형 항공기 컨테이너 속에서 거대한 레고를 맞추는 일은 나의 복잡한 생각들을 제거해 주며, 어떤 때는 힐링이 되었다.

스타트업이 책상머리에 얌전히 앉아 탁상공론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뛰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기에 거의 6개월 간 지속된 업무 패턴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반복 육체노동이 계속될수록 외면했던 불안감은 점차 커져갔다. 나의 헛되고 커다란 희망에 대해 경영진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 이어집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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