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만리

by 한지원

괴산군 청천면에 '귀만리'란 동네가 있다.

우리 버스 노선중 청천 터미널에서 경북 상주시의 속리산 자락 중벌리까지 가는 노선이 있다. 이 노선은 오며 가며 '귀만리(龜灣里)'란 곳을 거친다.


조선 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은 출신지가 충북 옥천이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 괴산 화양동(화양계곡)에서 머물렀었다. 그러나 송시열 선생께서 화양동으로 가시기 전, 동네가 너무도 좋아서 마음속에 두었던 마을이 '귀만리'다.

낙향 후 기거를 위하여 '귀만리'를 찾았으나, '귀만리'는 이미 죽산 박 씨가 자리를 잡고 사는 마을이 되어 있었고, '너무 늦게(晩) 돌아오는(歸) 바람에 터를 잡지 못했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귀만리(歸晩里)' 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 우리 버스를 애용해주시는 단골 승객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칠십 대 중반의 아저씨로 애주가가 한 분 계신다. 열 번을 만나면 다섯 번은 술에 취한 모습이니 애주가로 불릴만하다.

이 양반 술만 잡수면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처음 보는 승객에게도 말을 건다.

물론, 대화를 하고 싶으셔서 말씀을 건네시는 것은 십분 이해되나, 억양도 귀에 거슬리고, 내용도 시비조(是非調)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말을 섞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시는데...

환갑을 조금 넘긴 나이인 것 같은데 정확치는 않다. 풍문에 의하면 한때는 도시에서 대기업에 다녔었다고 하며, 뇌졸중인지 심근경색증인지 모를 혈관질환을 앓았다고 하던데, 지금은 반신불수가 되어 의사소통조차도 많이 어려운 지경이다.

평상시의 행색은 깨끗하나, 몸이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옷에 실례를 해서 그런지 가끔씩 몸에서 소변 찌린내가 나기도 한다.

이분이 유일하게 가장 잘하시는 말씀은 "안ㆍ녕ㆍ하ㆍ세ㆍ요! " 이 인사말 다섯 마디가 전부다.

그나마 배에 힘을 잔뜩 주고, 기를 모아 한 마디씩 최선을 다해야 나오는 소리다.

이 분 버스 승하차에 최소 5분은 소요된다. 그러하니 버스기사들에게 그리 반가운 승객은 아니다.

귀만리에서 청천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채 오분이 안 걸리니, 이 양반이 버스에 타고,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리는 셈이다. 움직임이나 말하기가 불편할 뿐 생각은 비장애인과 다를 리 없지만,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한다.

해장국을 드시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귀만리에서 청천까지 일주일에 서너 번의 외출이 이 양반의 유일한 인생의 낙이라고 하는데, 이분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하는 인간이 주변에 거의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양반을 무시하기 일수요, 어린놈들도 반말지거리를 당연시 여긴다.


작년 추석절 부근으로 기억이 된다.

청천 터미널에 버스를 대고 버스에서 내리니,

"안! 녕! 하! 세! 요!"

라고 큰소리가 들린다.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큰 소리로 화답(和答)했다.

그 남자의 옆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명절에 딸이 아버지를 보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는 그날따라 입성도 깨끗해 보였고,

얼굴에도 여유 있는 미소가 흘렀다.

아빠를 걱정하는 딸에게 자신의 주눅 들지 않은, 당당하게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시골버스기사의 한마디 댓구 인사에 여유 있던 미소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변했고,

그 남자의 딸인 듯 한 젊은 여자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나에게 목례를 하였다.


시골버스기사도 얼굴에 흐뭇한 미소로 화답하며, 혼자의 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아는 척하기를 잘 했지...'

`
keyword
이전 21화신의 방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