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승강장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한 마을에 하나 있는 곳도 있고, 서너 개 있는 곳도 있으니 어느 마을은 50m 간격에 하나씩 있는 곳도, 어느 마을은 몇 km를 가야 겨우 하나 있는 곳도 있다. 현실이 이러하니 사람이 서있는 곳이 승강장이고, 내려달라고 하는 곳이 승강장이다.
교통법규상으로 전부 법규위반행위이며, 이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 사고의 책임은 버스기사가 짊어지도록 되어있다.
좀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이 어디 한둘 이겠는가?
그러나 승강장이 아닌 곳에서 승. 하차를 요구하는 승객들의 대부분들이 아니, 전부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니 시골 버스기사들은 불법을 감수하고라도 안전에 문제가 안 된다고 판단되면 승객이 원하는 곳에 승. 하차를 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시골버스 승강장은 벌판에 덩그러니 홀로 있기도 하고, 기둥 하나에 버스라는 동그란 푯말 하나 붙여서 세워놓거나, 상행 쪽에 승강장이 있으면, 하행 쪽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어도 승강장으로 간주한다.
도시의 승강장은 무정차 통과 시 법적 제재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시골버스의 상황이 이러하니 승강장에 사람이 없으면 시골버스 기사들은 무정차 통과를 밥 먹듯이 한다. 일일이 승강장에 정차한다고 가정하고 하루 배차된 노선을 다 돌려면 1박 2일이 걸릴는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하다가 오신 버스기사나, 본인의 삶이 법규나 규정을 지키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는 기사일지라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유행어를 상기한다면, 대한민국 괴산에 오면 괴산 법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데 별로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음을 느낄 것이다.
정지거리=공주 거리+제동거리
1)공주거리 (空走距離) : 사람이 정지 필요성을 느끼고 브레이크를 밟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자동차가 달린 거리
2)제동거리 :실제로 브레이크를 밟아서 속력이 감소하는 동안 정지할 때까지 이동한 거리
운전면허가 있거나 운전면허를 취득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식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동차 브레이크 시스템의 성능, 노면의 상태, 타이어의 마찰계수, 온도 등... 수 없이 많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없는 이유로 간단하게 정리했음을 말씀드리며, 페친들에게 이점 양해를 구합니다.)
결국 자동차의 정지거리는 공주거리와 제동거리의 변화에 비례한다.
위 문장에 멀미가 나는 사람은 반성해야 한다. 세계사나 프랑스 미술사 등 서양문화 예술을 모르면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부끄럽게 생각하고, 단순한 물리학 공식이나, 수학적 논리 전개를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여기는 풍토는 없어져야 한다.
시골버스기사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버스 운행 중 우측 전방에 승강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승강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룸미러로 버스 실내를 보니 내리고자 준비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승강장을 30m쯤 무정차로 무심코 지나쳤는데...
띵똥~,띵똥
벨 소리가 들렸다.
기사'(속 마음으로) 아마 다음 승강장에서 내리시는 모양이다.' 다음 승강장을 향하여 계속 운행
" 아! 안 내려 줘요!"
짜증 섞인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룸미러로 확인해 보니 팔순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벌써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내릴 채비를 갖추고 나를 보면서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이 아닌가...前 승강장에 내리려 하셨던 걸 내가 착각한 걸까...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앉아 계시라는 말도 못 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아 부드럽게 버스를 정차시키려고 노력했다.
드디어 버스가 길 옆 외딴집 파란 대문 3~4미터 남기고 정지하였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룸미러를 보니, 거울로 마주친 할머니 얼굴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흘렀고, 할머니의 독백성 하차 일성을 듣는 순간 이 모든 일은 할머니의 치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나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 어마! 쪼끔 모질라내...'
말년병장이 신임 소위를 놀려 먹을 때의 쾌감이었을까?
승강장을 지나쳐서 벨을 누름으로 확보한 공주 거리,
날카로운 일성으로 시작된 버스 제동,
엉거주춤 자세의 엉덩이 몇 번 들썩임으로 조절한 제동거리,
(버스기사는 이런 자세의 승객이 있으면 거의 풋 브레이크는 쓰지 않고 버스가 자연스럽게 정지할 때까지 기다린다. 아니면 앉아 계시라고 소리를 지르든가...)
기사의 심리까지 꿰뚤은 완벽한 전술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할머니의 치밀한 계획이라니...
선배 기사가 조언하기를 "그러려니 하세요!"의 말뜻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날 시골 할머니와 햇 병아리 기사와의 한 판 승부는 기사의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요즘은 나도 전술을 바꾸어 선제공격으로 내 자존심을 지키는 수비를 하기로 했다.
승강장이 아닌 곳에서 내리고자 작전을 시행하려고 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면 미리 여쭈어 본다.
" 어르신! 어디에 내려 드릴까요? "
이게 속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