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조용히 살아라(2/4)
⁋ 이게 소설이라고?...02
제법 먼 거리를 걸어온 것 같은데 빈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자정 이전에 집에 들어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벌써 아내의 지청구가 들리는 듯했다. 사무실 앞을 통과하는 사 차선 대로를 따라 걸어오다 유흥가들이 밀집한 남쪽 도로로 방향을 틀었다. 핸드폰 대리점과 여행사, PC방 간판들이 외벽에 어지럽게 걸려 있는 모퉁이의 3층 건물을 지날 때였다. 택시가 오나 보려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때 10여 미터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오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보도에 접한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아 가로등 불빛만으로는 얼굴 윤곽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남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청바지에 후드가 달린 회색 점퍼를 걸치고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가 퇴근 후에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하는 회사원은 아니었다.
왜 몰랐지? 연일 계속된 야근으로 피곤하다 해도, 걸어오는 동안에 여러 번 뒤쪽을 돌아보았을 텐데. 윤수는 태연하게, 마치 처음부터 그곳이 목적지였던 것처럼 핸드폰 대리점이 들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비를 피하려 했는지 길고양이 한 마리가 계단 구석에 엎드려 있다가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바깥의 어둠보다 더 짙은 색깔의 검은 고양이었다. 헉, 하는 비명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일 층과 이 층의 중간쯤, 건물 입구와 횡단보도 일부가 보이는 계단참에 몸을 숨기고 밖을 주시했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오른쪽 뺨에 댄 남자의 그림자가 입구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때마침 보행 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남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들어 봐, 미안하다고 했잖아. 핸드폰 통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들려왔다. 젊은이라고 하기에는 여린 목소리였다. 여자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지 못해 안달하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였다. 휴우, 윤수는 긴 한숨을 내쉬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바로 옆 어린이 놀이터 구석에 웅크려 있던 고양이 눈에서 날카로운 인광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택시에서 내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이 차선 도로 옆에 위치한 사 층짜리 다세대 주택은 그의 집을 빼놓고는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와 결혼을 전제로 동거할 때 아버지가 시골 밭을 팔아 마련해 준 집이었다. 아내는 겨우 집 하나 사주고 위세 부린다고 빈정거리지만, 윤수는 그 집 때문에 아직껏 큰 빚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지 싶었다. 이십 년이 넘어가면서 여기저기 손보아야 할 곳이 생겨나도 거주자들이 서로 무심하여 그냥저냥 견뎌내고 있었다. 인근 아파트 가격은 계속 오르는데 그 집은 오히려 처음 살 때보다도 떨어졌다며 아내는 궁시렁거렸다. 그래도 그는 크게 불만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다세대 주택들과는 달리 주차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대지가 넓어 지을 때부터 차량 여덟 대를 세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거주자들끼리 합의하여 세대별 주차 자리를 지정하여, 늦게 들어오더라도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그는 요즘 같은 주차난에 그게 어디야, 싶은데 아내는 마뜩잖아했다. 가끔 애 둘을 포함한 네 가족이 살기에는 비좁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번듯한 아파트로 옮길 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에게 그럴 여력이 생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애들 더 자라기 전에 넓은 집으로 옮기자며 한동안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들락거리던 아내도, 그의 경제적 무능력과 무욕을 절감하고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려다 윤수는 도로 쪽을 주의 깊게 둘러보았다. 다세대에서 서쪽으로 서너 집 건너에 있는 간이술집은 아직도 영업 중이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밤도 늦었고 굵어진 빗줄기 탓일 것이다. 비가 온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그는 천천히 간이술집 쪽으로 걸어가 북쪽으로 난 작은 도로까지 훑어보았다. 어디에서도 범죄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 흔한 방범용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조용한 동네였다. 술집 앞에서 비를 맞으며 담배를 피우던 중년 사내가 담배꽁초를 빗속으로 튕기고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빈속이지만 맥주나 한잔하고 갈까 싶은데 아내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집 앞으로 돌아온 그는, 다세대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 앞으로 가서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고 안쪽을 살펴보았다. 주차장 구석에 있는 가로등 불빛이 차 안을 어스름히 비추고 있었다. 사이드 브레이크와 자동변속기 레버가 주차 위치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차 둘레를 천천히 돌며 이상이 없는지도 살폈다. 바퀴도 발끝으로 퉁퉁 차보고 손으로 만져 펑크가 나지 않았나 점검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는 거리로 눈을 돌려 일별한 후 다세대 건물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 2층의 집 앞에 도착했다. 벽면을 더듬어 불을 켜고는 옆집 문을 쳐다보았다. 어른 눈높이께에 201이라는 숫자 밑에 ‘○○교회 신도의 집’이라는 작은 아크릴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 집에는 삼십 대 초반의 여자 혼자 살고 있다. 작년 겨울 초입 무렵에, 전에 살던 사람이 사업하다 부도를 내고 이사 간 후에 들어왔다. 경매로 나온 집을 낙찰받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위층에 사는 301호 아주머니가 관리인 역할을 자청해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알려주곤 했었다. 그러다 공사장 십장으로 일하던 남편이 허리를 다쳐 자리보전하자 집을 팔고 나가는 바람에 다세대 주택 내의 언로가 막혔다. 그렇다고 특별히 불편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낯가림이 심한 윤수는 위아래 층에 사는 사람들과 가벼운 목례를 나누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러니 이웃집 여자가 무얼 하며 먹고 사는지 알지 못했다. 드나드는 기색이 들쭉날쭉한 것으로 짐작하건대 회사를 나가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사는 젊은 여자라면 으레 연상되듯 오후 늦게 출근하여 새벽에 들어오는 그런 부류도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 윤수가 아침 운동을 위해 새벽에 나가다가 마침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분홍색 트레이닝복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입에서 튀어나온 인사에 그 여자도 아, 예, 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머뭇거리며 그가 주차장으로 나오자 여자는 이미 도로를 따라 멀찌가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 있는 소공원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이 년 전에 시에서 버려진 농지를 매입해 건강공원을 만들었는데, 우레탄을 깐 트랙에 운동기구까지 제법 구색을 갖추어 놓았다. 그도 가끔 이용해 왔고 그날도 거기에 가서 걷기 운동이나 하려고 나선 길이었다.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그는 공원 방향이 아닌 골목으로 들어가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들어왔었다.
잦은 회식으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운동하는 윤수와 달리 그녀는 꾸준히 나가는 눈치였다. 아침마다 현관 철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경첩이 녹슬어 끼익끼익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지을 때부터 방음이 부실했는지 계단의 웬만한 소음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얼마 전의 사건 이후로 옆집은 아침이든 저녁이든 비어 있는 집처럼 기척이 없었다.
“이웃집은 왜 저렇게 조용하지?”
아침에 출근하면서 무심한 척 아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뭐가?”
“아니, 지난번 그 일 치르고는 한 번도 얼굴이 안 보이길래.”
“관심 있어? 그 여자한테?”
아내는 작은 눈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아내는 윤수에 대해서 턱없이 자신만만했다. 그의 주제로는 단란주점에 가서도 아가씨 손 한 번 잡지 못할 위인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그의 월급 통장을 직접 관리했고, 급할 때 쓰라고 그에게 준 카드 사용 내역도 꼼꼼히 따졌다. 용돈도 달라고 하기 전에는 챙겨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딴생각에 빠지게 된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게 월급쟁이 남편을 둔 여자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일지 몰랐지만, 평균적인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다소간의 금전이 필요한 법이다. 출장비 등으로 마련한 비자금 계좌를 들여다볼 때마다 그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관심이라기보다는 궁금하잖아. 그런 황당한 봉변을 당했는데.”
윤수가 짜증이 배인 목소리를 가장하여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 여자 엊그제 우리 집에 왔었어.”
“정말?”
“응, 고맙다고 그러더라. 덕분에 큰 화를 면했다고. 과일도 사 들고 왔던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