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조용히 살아라(1/4)
⁋ 이게 소설이라고?... 01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이 모 씨는 퇴근길에 집 앞에서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괴한들은 그의 신원을 확인한 후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 씨는 눈 주위를 스물다섯 바늘이나 꿰맸고 코뼈에 금 가서 전치 8주의 진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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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여럿 있었다. 모르는 번호들이다. 사무실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다. 사무실 창으로 비친, 낮 동안 차들로 북적이던 사 차선 도로는 가끔씩 택시들이 빠르게 지나갈 뿐이다. 아침 일곱 시에 출근했으니 열여섯 시간을 사무실에 박혀 있는 셈이다.
신의 직장이라는 공기업에 다니는 윤수는 꼬박 일주일째 내년도 사업계획과 씨름 중이다. 지점장은 퇴근하면서 오늘 중으로 마무리하라는 엄명을 그에게 내렸다. 금융계 경영의 귀재로 불리던 사장이 새로 취임한 이 년 전부터 한 해 업무는 11월에 마무리하고, 12월부터는 새해의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례가 만들어졌다. 엊그제 나름대로 아이템들을 추려 지점장에게 초안을 보고했다. 지점장은 두어 장을 넘기다가 결재판을 그의 발 앞으로 내동댕이쳤다.
“관리과장, 이런 사업계획을 가지고 한 해를 꾸려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사장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란 말이야. 다시 해 와.”
지점장은 사장을 무서워했다.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연초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기존의 간부 인사이동을 수시 인사 방식으로 바꿨다. 그 시기도 종잡을 수 없었다. 사장밖에 몰랐다. 취임 초 어느 지점인가를 방문했는데,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말실수한 지점장을 바로 다음 날 대기발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일 이후로 지점장을 비롯한 간부 직원들은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다.
지점장은 ‘사장님 입장’을 강조하지만 사장의 생각을 지점장도 확실히 아는 건 아닌 듯했다. 올해 사업계획을 작성하던 작년 이맘때에도 열 번이 넘도록 지점장실을 들락거리다 결국은 초안을 약간 수정하여 확정했다. 그나마 윤수가 고생고생하여 작성한 사업계획을 사장에게 보고할 기회도 없었다. 매출액의 1%도 차지할까 말까 한 소규모 지점까지 사장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정년퇴직을 일 년여 남겨 둔 옆자리의 자재과장은 시곗바늘 두 개가 6과 12를 가리키는 순간에 관리과장 고생해, 하면서 나갔다. 관리과의 가장 고참인 이 대리도 슬금슬금 뒤따라 나갔다. 내일 아침에 그들은 아홉 시가 다 되어 미처 삭지 않은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할 터였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윤수가 관리과로 보직을 받아 왔을 때부터 이 대리는 그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나이가 자신보다 적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얼마간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관리과의 서무를 맡는 여직원도 그의 업무지시를 때때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마도 보란 듯이 시위하는 이 대리의 행태를 꼬집어 야단치지 않는 그의 업무 스타일을 간파했는지 모르겠다. 윤수는 두 사람에게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직접 업무를 처리했다. 그런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고 관리자로서의 직무 유기로 비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회사원의 책임 어쩌고 하면서 훈계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집에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나서 자다가 깬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일 없어?”
“그래요. 저녁은 먹었어요?”
“아직…. 집에 가서 먹지, 뭐”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녁도 못 얻어먹고. 오늘도 열두 시 넘기겠네.”
“거의 마무리되었어. 한 시간 이내로 들어갈게.”
“알았어요. 가능하면 오늘 넘기지 마세요.”
“참, 아이들은 다 들어왔지?”
“들어왔다가 큰애는 독서실에 갔어요. 이제 들어오겠죠, 뭐.”
아내는 언제나 씩씩했다. 시 변두리의 가난한 집안 둘째 딸로 태어나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젊은 날을 보냈을 텐데도 삶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침착했고,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게다가 감정 표현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3년 전에 시골에서 혼자 사시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얼마 되지 않은 재산을 놓고 형제간에 곱지 않은 말들이 오간 적이 있었다. 아내는 그와 의논도 하지 않고 형제들을 집으로 오라하고는 담판을 지었다. 재산을 아들딸 구분 없이 똑같이 나누는 대신에 제사도 공평하게 분담하자고 제안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드는 시누이들에게, 장남이 꼭 제사를 도맡아야 하는 법은 있느냐고 받아쳤다. 물려준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버지가 살던 집과 남에게 빌려줘 부쳐 먹게 했던 밭 두어 뙈기가 전부였다. 그와 남동생, 누나와 여동생 네 사람이 나누면 웬만한 원룸 전셋값도 되지 않을 재산이었다. 그와 남동생은 옆에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제수를 포함하여 여자 넷이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결국 재산은 그와 남동생이 똑같이 나누어 갖고 제사도 알아서 하되, 시누이들에게는 얼마간의 성의 표시하는 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성의 표시가 어느 정도였는지 윤수는 물어보지 않았고 아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해결 방안에 불만이 없었는지 그 후로도 아내와 시누이들 사이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그는 내색은 안 했지만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큰처남이 제사와 재산을 다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가끔 중요하다 싶은 일을 대충대충 넘기는 아내의 대범함이 못마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십 년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아내의 그런 성격 때문에 곤란을 겪은 기억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 아내의 생각이나 선택이 옳았었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나 생각하며 윤수는 핸드폰에 찍혀 있는 부재중 번호를 눌렀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아니라 앞에 지역번호가 달린 일반전화였다. 고객님,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받는 전화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다른 전화번호를 이용해 달란다. 다른 번호에 걸어도 같은 마찬가지였다. 공중전화에서 걸어온 전화 같았다.
그놈일까? 드디어 그놈이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윤수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집 앞에 주차된 차량 연락처를 훔쳐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핸드폰 번호를 알아낸 다음, 공중전화를 이용해 그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는 게 틀림없었다. 통화기록을 뒤져 지난 부재중 번호들을 확인했다. 비슷한 조합의 번호가 몇 개 더 보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몸에 오스스 한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사무실 문을 잠근 후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오다 오늘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일 년에 네 번 만나는 정기 모임이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들이라 어느 정도 자리들을 잡았는지 참석자가 제법 됐다. 적당한 모임 장소를 찾기 힘들다고 총무가 투덜거리곤 했다. 총무에게 전화하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쯤은 뿔뿔이 흩어져 이차를 갔을 것이다. 굳이 뒤따라가 술값이나 축낼 필요는 없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오늘처럼 야근하다 열 시가 넘어 합류했다가 모두들 취해버린 단란주점에서 몇 달 치 용돈에 해당하는 술값을 내준 적이 있었다. 총무가 나중에 회비에서 벌충해 준다고 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갔다. 덕분에 카드를 메꾸느라 오래 고생해야 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 내는 어스름한 공간 속에서 가는 빗줄기들이 바람에 어지럽게 흩날렸다. 아침 뉴스에서 오후부터 흐려지다 밤에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일기 예보를 들은 기억도 났다. 도로가 젖어 있고 보도블록 곳곳에 물이 고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비가 온 듯했다. 비가 오는 것도 모른 채 업무에 매달려 있었다니.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머릿속에 설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언제부터인가 윤수는 살아가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할 능력이나 배짱도 없는 그로서는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게 편했다. 괜히 삶에 어깃장을 놓아 마음 심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게 서른쯤인지 마흔이 넘어서인지 잘 모르겠다.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회사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다 시내 번화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밤 열두 시가 가까워지는 거리는 빗속에서 흐물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택시가 오나 뒤돌아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서희에게 전화나 해볼까. 윤수의 회사 고객센터 상담원으로, 그가 영업업무를 담당할 때 알게 된 여직원이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거 없어 답답할 때 가끔 만나 술을 마시고 어쩌다 마음이 동하면 모텔을 다니기도 하는, 그렇지만 서로에 대해 심각한 요구는 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그런 사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둘이 있고 무얼 하는지는 모르지만 꼬박꼬박 생활비를 가져다주는 남편과 산다. 결혼한 지 십 년이 넘는데 남편이 뭘 하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니?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게 마음 편하잖아, 라며 쿨하게 대답했다. 동료들 아이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성적은 어떤지까지 궁금해하는 아내에게 익숙한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거인으로서의 의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 그게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 서로에 대한 기대나 집착도 줄어들고 상처받을 일도 적다고 했다. 그녀가 때로는 새벽 서너 시가 되어도 집에 가야 한다며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다 도로 집어넣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불러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