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글쓰기
○ 갑질에 시달리던 할인 마트 노동자가 죽었다. 신문이나 방송은 ‘어려운 가정 환경에도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문장을 담아 그녀의 죽음을 보도했다.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기자들은 어떻게 행복한 가족이었다는 것을 알아냈을까? 피해자가 살았던 곳을 찾아 주변을 탐문했을까?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부 싸움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이들도 착하고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영화 구경도 자주 가는 것 같더라... 혹은 삶이 행복했어야 그녀의 죽음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의도로 그런 문장을 집어넣었을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부분 기자들은 그런 사건에 대해 주변을 취재할 만큼 한가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오보이며 사실을 왜곡했을지도 모르는 문장은 비문이다.
○ 점심으로 나온 잔치국수를 젓가락질 몇 번으로 입에 욱여넣고 그늘을 찾아 드러누웠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도 아까웠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육신을 달래야 했다. 오전 내내 잔뜩 뭉쳐진 근육을 풀어줘야 오후 노동을 견딜 터였다.
○ 사회가 건강하다는 건 별 게 아니야. 누군가 힘들 때 힘들다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 말을 들을 누군가가 아, 정말 힘들겠구나, 하고 손을 내밀 수 있으면 건강한 사회지...생계 때문에 하루 종일 폐지를 주어야 하는 사람들도 몸이 아프면 며칠쯤 쉬어도 그럭저럭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 ‘고갈’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혓바닥과 입천장이 바싹 마르고 목구멍이 깔깔해진다. 침샘이 말라붙었는지 타액이 쉬이 모아지지 않는다. 물을 마시고 싶다.
○ 가까운 미래에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재능’이 아니라 ‘성능’이 될지도 모른다. 성능이 우수한 인간은 지배자가 되어 다른 인간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재능과는 달리 성능은 후천적이다. 부유할수록 성능 좋은 인간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 사회복지 전문가라는 대학교수는‘노숙자들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들의 자활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알맹이가 하나도 없는,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굳이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의 입을 빌릴 필요는 없다.
○ 담당자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 회사의 부당한 업무처리로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시면 법적인 판단을 받아보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에둘러 표현했지만, 나는 ‘불만이 있으면 법대로 합시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소송이라는 단어는 자제했다. 상대방이 발끈하여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서랍장 위에 놓여 있는 시계 두 개가 번갈아 재깍거리고 있었다. 한쪽이 똑딱하면 다른 쪽이 이어서 똑딱했다. 따져보니 0.5초 단위로 나누어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시계가 열 개라면 0.1초 단위의 삶도 가능할 것 같았다.
○ 그는 자신의 감정들이 하나둘 노출되는 것을 무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낯설었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게, 그러면서도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감정들이 원래부터 없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 누군가의 불편이 늘어나지 않고도 내 편안함이 더해질 수 있다는 것은 허상이다. 아니면 이기심이거나.
○ 그는 공무원 시험에 내리 낙방을 하는 아들에게, 꼭 남들처럼 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인생에는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 눈치가 보여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안정된 직장이라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뛰쳐나왔을 때,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만이 다시 사회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는 것도.
○ 너는 네가 특별한 존재인 것 같지?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가족들 말고는 신경 쓰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걸! 가족들도 며칠이 지나면 네가 남긴 통장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슬픔 같은 건 잊어버릴지도 모르고.
⁂⁂ 좋은 글이란 하나의 사건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해 놓은 글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속에 묻혀 있는 삶의 숨은 진실들까지 함께 복원해 놓은 글이다 – 이만교/글쓰기 공작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