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 소설) 제가 안 보이세요? (1/5)

⁋이게 소설이라고?... 10

by 둘리아빠





※ 제주어로 쓴 소설입니다. 아래아(ㆍ)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어 그림 화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어가 낯설은 분들을 위해 표준어로 풀어 쓴 부분도 같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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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어 쓰면 ……



어머니가 모질게 끌고 가던 목숨줄을 슬며시 내려놓으신 게 벌써 두어 해가 넘어가네요. 나이 들어갈수록 시간은 잠깐 한눈파는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재빨리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오늘 오빠네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을 텐데 잊지 않고 찾아오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거기에 가지 않고 혼자 방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어요. 어머니 기일이라는 말을 오빠로부터 듣기는 했지만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장마철이라 그런지 매일 비가 내리네요. 지금도 밖에는 세찬 비가 내리는 중이에요.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벗하여 마시는 술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비가 올라치면 찾아드는 허리 통증도 조금은 눅이는 것 같고요.


어머니 발인하는 날도 비가 왔던 거 아시죠? 비 예보도 없었는데 난데없었죠. 그런 비를 보고 소낙비라고 하나요? 운구차에서 관을 내릴 즈음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하관을 할 때쯤에는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어진 것처럼 오더군요. 봉분을 만드는 일꾼들이 부랴부랴 무덤 자리 위에 천막을 치기는 했지만, 관 틈을 비집고 들어간 빗물에 삼베 수의가 젖었을 겁니다. 춥지 않던가요? 다리가 불편하여 지팡이에 의지하여 따라온 외삼촌과 동네 어른들이 호상(好喪)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장례식날 비가 내린 덕분에 세 아들과 며느리 상제들은 억지 눈물을 짜낼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얼굴 위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으니까요. 이제나저제나 어머니가 죽기를 은근히 기다렸을 텐데 눈물이 나올 리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서럽고 불쌍한 여자처럼 울며불며했습니다. 봉분제를 지내면서도 울었고 친척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면서도 울었고 빗물이 섞여 밍밍한 해장국을 먹으면서도 울었어요. 하도 울어서 눈이 뭉게질 지경이었습니다. 오빠와 두 남동생들은 그러는 저를 슬금슬금 곁눈질하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요.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치매에 붙들린 채 말년을 보낸 어머니를 떠올리며, 산다는 게 정말로 어지럽고 허망한 것인가 싶어 그렇게 울지 않았을까요?


어머니, 치매로 고생하시다 저 세상으로 건너가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죠? 별의별 귀신이 다 있어도 치매에 걸린 귀신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머니께 꼭 하고 싶은 넋두리 하나 있습니다. 이왕 제사 먹으러 내려오신 김에 거북하더라도 좀 듣고 가세요. 어머니가 치매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딸인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말씀드릴 테니까요. 어디 울며 하소연할 데도 없어 혼자만 속을 태우며 속상해하던 사연을 말입니다. 그래야 이 딸년 마음속에 가득 찬 응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으니까요.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뒤로 벌러덩 넘어지면서 고관절이 부러진 게 아마 돌아가시기 5년 전쯤일 거예요. 아버지 장례 치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으니.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는 참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셨더라구요. 동네 어른들이랑 막걸리 한잔 걸치고 들어와서는 주무시다가 숨을 거두셨잖아요.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잔병치레도 별로 없으셨고.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시면 남은 자식들은 어떡하느냐고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그게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병원에서 어머니 수술을 담당한 의사가 그럽디다. 마취를 했었기 때문에 후유증으로 사나흘 ‘섬망’ 증상이 있을 거라고, 나이가 들면 열에 아홉은 그런 증상이 발생한다고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맥락도 없이 허튼소리를 한다길래 자식들은 그런가 보다 했지요.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런 증상이 계속되었습니다. 자식들 얼굴도 몰라보고, 밤새 잠도 자지 않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어요. 아무도 그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습니다. 간병인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도둑년이라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간병인은 사흘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죠.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자식들이 번갈아 병원을 나들며 간병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보름쯤 지나자, 의사가 퇴원하라고 합디다. 치매로 진전된 것 같으니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더군요. 집으로 모시든가 치매 전문병원으로 옮기라고 말했어요. 더할 나위 없이 정정하던 분이었는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빠를 비롯한 형제들이 모여 앉아 가족회의란 걸 했어요. 남자 형제들끼리는 미리 입을 맞추었는지,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려고 하는데 제 생각은 어떠냐며 묻더군요. 요양 등급을 받으면 국가에서 보조가 된다고 하니 돈은 얼마 들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서. 저는 모르겠으니 알아서들 하라고 대답했어요. 왜 그걸 나한테 묻느냐고, 어머니는 당연히 아들들이 챙겨야 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치려다 참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남의 일 대하듯 무심했느냐 하면, 남자 형제들에게 섭섭한 게 있어서였어요. 평생 공무원으로 살다 정년퇴직한 아버지는 두 내외가 살던 다세대 주택 말고도 시내에 삼 층짜리 건물을 하나 더 갖고 있었습니다. 법원과 검찰청사가 있는 부근이라 임대도 잘되었죠. 그때 시가로 30억 원쯤 했다더군요.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그걸 세 아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서 물려주었습니다. 다세대 주택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면) 나중에 제사를 맡아야 할 오빠 몫으로 남겨두고. 그런 사실을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어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똑같은 자식인데 딸이라고 무시하다니 너무 화가 났습니다.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더라면 덜 서운했을 텐데.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재판을 걸면 제 몫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어요. 돈 몇 푼 때문에 형제들끼리 다툰다는 소문이 나면 주변 사람들이 비웃잖아요. 조카들에게 돈만 아는 고모로 비춰지는 것도 부끄럽고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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