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열여덟 김유정이 세 살 많은 명창 박녹주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이태가 넘도록 걸핏하면 혈서를 보내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던 집요한 짝사랑은 순진한 열혈청년의 애정행각을 넘어 거의 범죄 수준으로 넘어갔다. 2남 6녀의 일곱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시집간 누나들을 그리워하면서 생긴 애정결핍이 평생 연상의 여인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만든 것이다.
몸이 약한 김유정은 자주 횟배를 앓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다. 담배연기가 몸 안에 있는 회충을 죽인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늑막염과 폐결핵이 그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아홉 살 소년은 시집간 누나 집을 전전하며 건달 같은 매형을 피해 눈칫밥을 먹었다. 소심한 성격에 말을 더듬는 증세까지 생겼다.
첫사랑은 열정이 치열한 만큼 그 상처도 치명적일까? 마음의 상처가 처절한 그대로 몸으로 옮아왔기 때문이다. 늑막염과 폐결핵, 변비와 치루가 짝을 이뤄 실연의 아픔으로 드러누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가산을 탕진하고 숨어버린 형에게 따지러 춘천에 갔다가 건강이 완전히 망가졌다. 낙망한 그는 나이 많은 들병이(술을 병에 담아 파는 여인)들과 어울려 술에 빠져 살았다.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아홉 작가의 모임 구인회(九人會)에서 만난 이상(김해경)이 동반자살을 제안했다. 가난과 질병으로 피를 토하던 이상이 같은 처지의 김유정에게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를 함께 하자고 권한 것이다. 김유정은 정말 글을 쓰고 싶었다. 그는 다섯째 누나의 단칸방에서 촛불 앞에서 앉아 자신에게도 제발 ‘봄’이 오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소설가는 결국 똥구멍이 미어터졌다. 어떡하다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 먹을 지경이 됐을까? 어릴 때 갑자기 들이닥친 가난에 끼니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때우면서, 앉아서 줄곧 글만 쓰다 보니 변비가 생기고 변비는 치루로 악화됐다. 게다가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커지면서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린 것이다.
늦은 겨울에 태어난 김유정은 유별스레 봄을 좋아했다. ‘봄, 봄’이나 ‘동백꽃’에서 보듯, 절망적인 현실을 달래며 노란 ‘동백꽃’이 필 봄을 필사적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치루와 폐결핵이 몰아치는 겨울은 너무 길었다. 1937년 친구에게 유언 같은 마지막 편지를 보낸 11일 뒤, 노란 ‘동백꽃’이 필 무렵인 3월말 그는 채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더 이상 봄을 기다릴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