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의 목적
처음에 요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앞에서 밝혔던 바
뻣뻣한 나의 몸이
삶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뻣뻣한 몸은 딱딱한 태도를 만들고 굳어 버린 태도에서는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갈대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바람보다 빨리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는
그러나 어떤 강풍에도 뿌리채 쓰러지지 않는 유연함을 바랬다.
조용한 울음을 울지라도, 꼿꼿이 서 있는 갈대처럼 부드러워짐으로써 강해지고 싶었다.
몸이 변하면 삶에 대한 자세도 변하고 마음의 의지도 굳건 해 질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들이
요가를 하는 기대감이었다.
요가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도 종교 전통에서 기원하여 신체적 운동과 정신적 수양을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서
즉 궁극적인 해탈(모크샤)을 목표로 하는 과정으로서의 수련법으로 시작되었다.
뻣뻣한 나의 몸이 유연해짐으로서 삶의 자세가 변화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요가의 목적에 부합되는 점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몸과 마음은 따로 이지만 결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 것 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전에 새끼발가락을 다친적이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새끼발가락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 하고 살았는데
다치고 나니 내 몸의 중심이 새끼 발가락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존재는 마치 무거운 기운을 온몸으로 발산하여 나의 모든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발걸음마다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존재는 나의 마음 깊은 곳 까지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감은 더 짙어졌고 이대로라면 다음 한 걸음 조차 힘들 것 같던 경험이있다.
세상의 중심이 세끼 발가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그로 부터 기우뚱거리며 쏠리는 것 같았다.
몸이 영혼을 흔들고 있다는 건 착각이었지만 심히 모든 것이 기우뚱 갸우뚱 거리는 몇일이었다.
몸이 자유롭지 않고서야 영혼이 가벼워 질 수 없다는 생각이 거기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벼워진다는 것 부드러워져 한없이 가벼워 지는 것은 바람앞에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흘려 보내는 지혜로움이라고 믿었다.
외부적인 요인, 내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나는 통제 할 수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에 일어나는,
내 마음에 일렁이는 바람들을 잠재우고 길들이는 것 정도가 아닐까.
내속에 것들을 내 의지대로 몸의 주인으로서 삶의 주체자로서 나를 통제하는 것.
그로인해 나는 작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요가의 목적이 거창하게 해탈의 과정을 위한 수련은 아니더라도 내 몸을 바라보고 내 몸의 쓰임들을 알아가는 과정으로서도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부드러워지기 위해서 시작했던 나의 요가는 그래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몸의 움직임과 아사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 하려기 보다.
그 자세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기 보다
나의 몸 상태를 바라보고
내 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로인해 미묘하게 불어오는 마음의 일렁임을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고 있는 중이다.
작은 요가 매트위에서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대화로 이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호흡과 움직임 하나에 담긴 내 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그 순간에 나는 온전히 존재하며 살아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로서 살아있기 위해 작은 매트를 펴고 단다.
세상을 향해 단단하게 단다.
아직 어설프지만 허리를 곧곧하게 단다.
Stiff 그럼엠도 유연한 단다.
단다 아사나가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Stiff 그럼엠도 유연한 단다.
단다 아사나가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호흡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