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따뜻한 커피를 담고 있던 종이컵은 찌그러진 채 먼지가 내려앉은 책상 위에 미처 정리되지 않은 서류뭉치들과 함께 놓여있다. 낡은 커튼과 프레임일 뿐인 창에는 아무런 빛도 스며들지 않는다.
죽음 같은 냄새를 풍기는 담요를 아무리 어깨 위로 끌어당겨 보아도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햇살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저 거칠고 투박해서 오래 전의 유물 같은 햇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가늠해 보려고 해도 희뿌연 창으로는 무엇도 확인할 수 없다. 이 공간 어디에 시계가 있는지 초침 소리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울리고 있다. 이 방 안에서 시계초침 만이 유일한 생명을 지닌 것처럼 뚜렷하고 명료하다. 누군가가 프레임일 뿐인 창을 통해 이곳을 들여다본다면 담요를 덮고 있는 나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머리는 헤집어져 있고, 수염이 아무렇게나 자라 얼굴을 뒤덮고 있어 혈색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담요와 나의 경계를 구분하지도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누구도 이 방안을 들여다볼 사람은 없다. 긴 복도를 통과해서 이곳을 지나가는 유일한 사람은 순찰을 위한 경비원일 뿐이다. 그 조차도 이곳 상황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는 긴 복도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의 불빛을 밟으며 작은 손전등으로 천장의 전등이 비추지 못하는 곳을 훑어보면 복도를 통과해 간다. 얇고 조심스러운 그의 발소리는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오래된 기억의 건물 속을 홀로 헤매는, 존재의 리듬처럼 들린다. 문득, 발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멈춘다. 꿈결 속에서 그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지도 모르겠다. 문 밖의 어둠과 빛, 그리고 묵직한 발소리. 이 오래된 장소에 내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묻고 있는 듯했다.
그가 돌아와 나의 존재를 들여다보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알맞은 시간에 적당한 순간이 아닌 시간 속에서 불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나를 본다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복도 저편 끝에서 멈춰 선 발걸음은 다시 리듬을 찾고 멀어진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이 춤을 추듯 공간으로 밀려 들어와 일렁인다.
프레임일 뿐인 창은 여전히 소리 없이 닫혀있다. 시계 초침 소리 덕분인지 시간은 차근차근 떠밀려 어둠의 장막처럼 시커멓기만 하던 것들이 흐릿한 경계를 들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창을 열고 밖의 공기를 안으로 들이고 농담 같은 공기를 이 방안에 녹여내고 나면 아침이 올까?
찌그러진 종이컵에 또다시 뜨거운 커피를 담아낼 수 있다면 아침이 오지 않는다 해도, 그럴 수 있지,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뜨거운 커피도 동전도 남아 있지 않은 나는 조급해지기만 한다.
희미한 햇살의 흔적이 남아있었던 담요를 가만히 어루만져 보지만 이제는 완전한 종식처럼 담요에는 햇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도 햇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아득한 오래전 유물 같다.
저 창을 열 수만 있다면 아침이 올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물론 창은 잠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걸쇠를 위로 올리고 조금의 힘을 가하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밀려나 열릴지도 모른다. 프레임으로만 보일지 모르지만 , 그것은 분명 창이다. 힘겨운 신음소리를 낼지 모르지만 열릴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죽음 같은 담요를 덮고, 찌그러진 종이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거친 담요를 걷어내기를 간절히 바라던 애타는 마음이 창문너머 간절한 바람으로 느껴지는 데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느 시 어느 장소에 나는 그렇게 갇히고 만 것일까. 아무도 오지 않는 이곳에. 존재의 리듬처럼 경비원의 발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는 이곳. 나는 잊히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 본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곧 소멸할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기 전 아니 어쩌면 이곳의 시간은 아침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지도 모른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일 뿐 인지도 모른다. 프레임인 창을 열어 밖을 확인해 보지 않는 다면 무엇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통로를 따라 이곳과 그곳 그리고 그들과 연결되지 않는 다면 나의 시간은 완전한 종식의 순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주머니 안에 남은 몇 개의 동전과 그것을 느끼는 감촉의 손이 과연 나의 손인지 나의 감각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시계 초침만이 살아있는 생명인 듯 성실하게 방안을 울리며 나의 의식을 깨우려 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것들을 일깨우려 시간은 착실하고 성실하게 나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완전한 종식처럼 사라진 햇살의 흔적만을 찾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