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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일권 Nov 15. 2022

일흔세 번째 겨울

고래가 노는 세상

2022년 11월 어제가 입동이라 했으니 이제 73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늘 그랬지만 가을 단풍은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며칠 전 비가 내리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빽빽했던 숲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뒷산의 민낯이 쌀쌀한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낙엽 지는 가을보다는 하얀 겨울에 떠나라는 최백호의 노랫말이 새삼 느껴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봄가을을 좋아하지만 나는 내가 동면할 수 있을 것 같은 겨울이 더 좋다. 왜냐하면 겨울옷을 입으면 뚱뚱한 티도 적게 나고 또 다른 계절에 비해 입을 옷도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 따듯한 오리털 코트를 입고 눈 내리는 강변에 서서 힙 플라스크에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면 내가 영화의 주인공처럼  될 수 있을 것 같기에 일기예보에 눈이 올 거라는 소식만 있으면  춘천 소양강변 같은 곳으로 떠나볼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겨울을 즐기는 방법은 고성 같은 동해 겨울 바닷가에서 오징어 물회에 소주 한잔한다거나 눈이 펑펑 내리는 일본의 작은 시골 노천 온천에서 몸을 담그는 건데 어찌 됐던 이 나이가 되면 다음 겨울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올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겨울은 눈길이 가는 책들을 보거나 글을 좀 더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시보리란 일본말의 원래 뜻처럼 그렇게 내 머리를 쥐어짜도 지금 상태로는 더 이상 나올 게 없을 것 같기에 당분간은 휴지기(休止期)를 가질 생각이다. 너무 심하게 짜면 질기고 맛이 없어지는 데친 숙주처럼 될지도 모르기에 말하자면 초밥의 달인처럼 밥이 숨을 쉬게 만들어야  글의 주제가 다시 떠오를지 모른다는 고수 작가 같은 생각을 해봤다. 혹시 담배가 글 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끊은 지 오래된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싶을 정도로 절실하진 않으니 담배는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주변 환경 때문인지  집에서 술을 마시면 곧바로 졸리우니 둘 다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게 없다. 그러고 보면 일 년에 책 몇 권씩 뚝딱  만들어 내는 작가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스토리는 다코야키를 만드는 달인처럼 신기하고 부러울 뿐이다. 누구나 바다를 만나면 와 바다다 하고 소리치게 되는 것처럼 그런 일상의 목마름이 내게 쌓여 가고 있는것 같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포도농장 가는 길에 가지런하게 줄지어 서있는 싸이프러스 그늘 사이로 스쿠터를 타고 달린다거나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처럼 논 한가운데 서서 주먹밥을 먹고 있는  따스하고 행복한 그런 사색(思索)의 시간을 늘 꿈꾸고 있기에 그래서 아무 때고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각설하고 화투 그림으로 혼이난 가수 조영남 같은 사람들은 이사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일들이 돼버렸듯이 음악이나 미술 거기다 학위논문과 디자인까지 표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든가 보다. 어디까지가 표절인지 그걸 가늠하기는 어려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자존감도 없이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다는 건 자신을 깎아먹는 양심에 걸리는 짓인데 말이다. 전에 친퀘테레 가는 길에 피에트라산타에 설치된 수많은 조각 작품들을 보며 미켈란젤로가 가져다 사용했다는 대리석의 산지 카라라가 가까이 있었기에 많은 조각가들이 쉽고 자연스럽게 조각을 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기는 하지만  이런 토대를 만들어 주는 정부나 지원해 주는 기업과 사회풍토가 훌륭한 작가나 예술가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하여간 가끔 대형문고에 쌓여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이젠 우리의 위상도 노벨 문학상 정도는 가져올 수 있는 시기가 되질 않았나 생각해 본다. 조금은 모자란 듯 보이더라도 순수한 자신만의 생각 그대로를 표현하는 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의 의미처럼  그런 것이 모든 예술의 멋과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무탈하게 지낸 올 한 해, 검은 호랑이의 해도 저물어가는데 다가오는 74번째 검은 토끼의 해는 나와 어떻게 대면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지며 늦은 밤 갑자기 생각난 작은 거인 등소평과 처칠의 어록을 새삼 뒤져보는 나는 뭔가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 한지도 모른다  


"피에트라산타 " 토스카나주 루카도에 있는 세계 조각 예술의 본고장"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다우나 사치스럽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 이란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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