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마지막 회) 낮달을 타고 떠난 후크 선장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소년의 재판이 있었던 직후, 나는 원장에게 사표를 내고 서울로 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올 날을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소년과 그 여선생에 대한 죄책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인도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히말라야 설산의 구도자처럼 찬바람 속에서 눈 쌓인 능선을 오르내리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아무 답도 찾지 못했다.
6개월 후, 인도에서 돌아와 강 검사에게 전화로 알아봤더니 소년에게는 징역 15년형이 선고되었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즈음 항소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고 했다. 물론 가장 중한 존속살인죄가 적용되었다고 했다. 소년원에 송치되기 전에 보호감호 조치를 받아 먼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에는 낡은 폐선 한 척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날 검찰청 복도에서 강 검사가 한 말과 같이, 내가 단지 일주일만 더 일찍 소년의 애원을, 아버지를 보내 달라는 소년의 그 절박한 애원을 들어주었더라면, 소년은 형사미성년자가 되어 그런 중벌로 처벌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머뭇거렸다.
물론 내가 김 과장의 의견처럼 처음부터 소년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하던가, 그렇지 않더라도 소년과 공범이 되지만 않았더라도, 애초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에서 갈팡질팡하고 말았다.
그리고 재판에서 낡은 목선에 아버지를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내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집요한 추궁에, 소년이 순순히 자백하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정상이라도 참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년은 끝까지 아버지와 함께 해적놀이를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미 갑판장이 죽였다고 막무가내로 우겼다. 스미 갑판장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아버지는 검은 해적 깃발을 펄럭이는 목선을 타고 돌아와 네버랜드를 공격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의 이러한 진술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선정된 국선변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국선변호인 또한 강 검사처럼 어찌하든지 가장 중한 존속살인죄만은 면해보려고, 소년을 접견한 자리에서 알아듣기 쉽게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소년은 끝까지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날 내가 법정을 나온 후에 있었던 국선변호인의 반대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끝까지 아버지가 눈을 통하여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고,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통하여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마음을 모아보면 그것은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음만 모으면 어린 자기도 쉽게 알 수 있는 그것을 어른들은 왜 모르냐고 울면서 항변했다. 그날 그 달빛 시린 밤, 아버지를 목선에 태우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어본 아버지의 가슴이, 그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나를 목선에 태워다오. 나는 잠시 후 바람이 불면 돌아오겠다. 검은 해적 깃발을 펄럭이며 반드시 돌아와 네버랜드를 공격하겠다.”
형이 확정되고 난 후, 소년이 보호감호 조치를 받아 어느 정신병원에 보내졌는지, 아니면 어느 소년원에 송치되어 수형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아보지 않았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다시는 인양할 수 없는 내 가슴속 폐선에 갇혀 자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때의 재판에서처럼 소년이 아버지를 목선에 태워 바다에 떠내려 보내 살해한 것일까? 해적놀이를 했다는 소년의 말이 과연 거짓이었을까?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사물이 과연 그 사물의 본질일까? 우리가 귀로 듣는 소리가 과연 그 현상의 진실한 울림일까? 아니, 진실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바닷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후크 선장의 묘소 위에 나 있는 키 큰 잡초를 흔들고 지나갔다. 풀들은 낮게 누웠다가 이내 다시 일어섰다. 시집에 적힌 시인의 말을 낭송한 나는 물기에 젖은 눈으로 점차 노을이 짙어 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아스라이 펼쳐진 수평선 위로 돛이 주렁주렁 달린 해적선 졸리 로저호가 다가오고 있다. 그 돛대 꼭대기에 이탈리아인 쎄코가 앉아 있다. 그 아래 갑판 위에 빌 주크스가 술통을 끌어안고 뒹굴고 있다. 양복쟁이 스타키가 갑판 위를 오가며 멋을 부리고 있다. 헤헤, 두목, 하면서 이상하게 생긴 모자를 비뚜름하게 쓴 스미 갑판장의 누런 이빨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졸리 로저호는 돛이 가득 펼쳐진 채로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뱃머리에 우뚝 서 있는 후크 선장이 보인다. 후크 선장이 갈고리 손을 들어 껄껄 웃으며 나에게 말한다.
(― 의사 선생, 잘 들었소. 내 아들이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참 다행이구려.)
― 후크 선장,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 그래요? 그것이 무엇이오?)
― 그것은 당신 아들 피터 팬이 이번 8·15 광복절에 특사로 석방된다는 것입니다. 확정된 형기 15년 중 삼 분의 이에 해당하는 10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나머지 형은 면제되어 가석방이 된다고 합니다. 내 그때 당신 아들 피터 팬과 함께 다시 여기에 오겠습니다. 그리고 더 반가운 것은 당신 아들이 교도소에서 혼자 공부하여 중, 고교 검정고시를 모두 합격하고, 서울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의 문예창작과에 특례 입학하였다는 것입니다.
(― 내 아들이 인간 존재의 삶에서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그만한 성취라도 했다니 아버지로서 정말 흐뭇하군요.)
― 그렇습니다. 후크 선장, 정말 대견하지 않습니까. 후크 선장, 당신은 이 토끼섬을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행복동산으로 가꾸려고 하였지요. 당신은 이 섬을 이기심에 물든 사람들의 피폐한 영혼을 구원하는 낙원의 치유동산으로 가꾸고자 하였지요. 당신 아들은 시를 통하여 그 꿈을 가꾸어 가고 있습니다. 아니, 당신 아들은 시를 통하여 이미 그 꿈을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자책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내 영혼을 당신 아들의 시가 이미 치유했으니까요.
(― 의사 선생, 내 아들의 시가 당신의 영혼을 구원했다고 하니, 그것만큼 더 반가운 소식이 없을 것 같소.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 후크 선장,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영면하세요. 피터 팬이 석방되면 그 아이는 내가 돌보겠습니다. 물론 아버지인 당신만큼이야 못하겠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여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볼 참입니다. 아내와도 이미 얘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게 영면하시구려.
(― 의사 선생, 내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제는 당신도 알겠지요? 내가 말한 존재의 진리라는 것을 말이오. 선도 악도 아닌, 생성도 소멸도 아닌, 시작이자 끝이고 끝이자 곧 시작인, 아니 시작도 끝도 아닌 그런 순환의 섭리 말이오.)
― 후크 선장, 내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 당신처럼 내가 존재 그 자체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 하하하, 그렇겠지요. 의사 선생, 당신도 이제부터 더 이상 자책하지 마시오. 당신이 그때 한 일은 존재의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였소. 내 아들이 한 것처럼 말이오.)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메아리의 여운이 낮고 깊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흘렀다. 후크 선장이 하얀 낮달 같은 돛배를 타고 노을 지는 수평선 하늘 저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비석 위에 놓인 종이컵 술잔을 들어 음복으로 한 모금 마셨다. 노을은 이제 적갈색으로 변하여 모래사장에도 내려앉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캠프파이어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을 가운데 두고 피터 팬, 웬디, 투틀즈, 슬리, 존, 마이클, 인디언 공주 타이거 릴리 선생님, 모두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고 춤추며 돌고 있다. 촐랑거리는 나나의 그림자도 보인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 여선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때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자라나 있을까?
내가 인양할 수 없는 낡은 폐선에 갇혀 자책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에, 소년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탄생과 소멸, 생과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항해하며 많은 생각과 고뇌를 했을 것이다. 후크 선장의 해적선 ‘졸리 로저호’처럼 돛이 주렁주렁 달린 ‘인생호’라는 돛배를 타고 험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가며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삶의 목적과 가치를 탐구했을 것이다.
아버지 후크 선장이 토끼섬을 낙원의 행복동산으로 가꾸기를 꿈꾸었던 것처럼, 소년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소년의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 후크 선장의 비망록에 적힌 글과 시처럼 어두운 세상의 하늘에 아름다운 언어의 비를 내리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 언어비는 소년의 억눌린 가슴에서 세상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은,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하기 위해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銀河)에 놓는 오작교(烏鵲橋)처럼, 시를 통하여 단절되어 고립된 사람과 사람과의 영혼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영혼의 징검다리, 이것이 곧 소년의 시집이었다.
소년의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소년은 그 언어비를 맞은 사람들이 시라는 소통의 가교에서 만나 눈물 젖은 시선으로 서로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나는 다시 옷깃을 여미고 후크 선장의 비석 앞에 서서 소년의 시집에 수록된 「해적놀이」라는 제목의 시를 낭송하듯 읽어 나갔다.
― 끝 ―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획기적으로 연장되어 이른바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유병장수의 시대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요양병원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잘 사는 일(Well Being)과 더불어 잘 죽어야(Well Dying) 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개인적으로는 죽음의 방식에 대하여 자신의 의사를 미리 밝혀둘 필요성(Dying note)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이러한 죽음의 방식에 대하여 의료계와 법조계는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말기 암 환자 등 완치가 불가능하고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조력자살의 방식을 법으로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를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적극적 존엄사>라고 한다.
현재 이러한 적극적 존엄사를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로는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법으로 허용하지 않는 데도 이런 조력자살을 시행한 의사의 행위는 물론 살인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게 된다.
다음으로 회생불가능한 환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장치를 제거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법률적 측면에서의 <소극적 존엄사>의 문제이다.
이 경우에도 환자의 회생불가능의 기준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연명치료장치 제거에 환자의 명시적 의사가 있었는가, 명시적 의사가 없었다면 환자의 의사를 어떻게 추정해야 하는가(이 소설에서의 후크 선장의 경우, 환자의 추정적 승낙) 등의 세부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고 회생의 가능성이 있으나 경제적 문제나 기타 이유 등으로 환자가 자의퇴원을 요구하는 경우(이 소설에서의 소년, 피터 팬의 경우), 이에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라도 응한 의사는 형벌(살인 또는 살인방조)로 처벌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이 소설에서의 의사인 박 과장의 경우, 자의퇴원과 의사의 치료중단).
반대로 회생의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의사의 의학적 견해에 반하여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고 퇴원시킨 보호자는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제기된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는 여전히 입법 미비 상태로 있었는데, 법학을 전공하고 법조계 언저리에서 일하는 동안에 저자는 이런 문제를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회적 공론화 과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생각했다. 다행히 이 소설이 처음 출간(2014년)된 이후, 2016년 2월 이른바 <존엄사법>이라고 불리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를 줄여 <연명치료 중단 등에 관한 법률>이라고도 한다)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의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후 2018년 2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 법에 따라 2022년 8월 기준 현재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에서 작성할 수 있는 <사전연명의료 의향서>(회생불가능한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적극적 의사를 사전에 법적인 절차를 거쳐 미리 작성해 두는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142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현재 시행되고 있는 위 법률에 의해서도 위에서 말한 조력자살, 즉 적극적 존엄사는 인정되지 않는다. 위 법률 제2조 4항에 의한 ‘연명의료’ 행위(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시행하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및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의학적 시술로써 치료 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 외에 환자의 생명을 임의로 단축할 수 있는 다른 의학적 시술이나 처치는 금지된다. 이른바 위에서 말한 <소극적 존엄사> 중에서도 그 적용 범위가 위 법률이 정한 행위로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의 제정 여부와는 별개로 존엄사 문제는 의학의 발달에 따른 수명 연장과 더불어 더욱 빈번하고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존엄사법>이 제정되었다고 하나 이 법의 미비점은 앞으로 계속 발생할 것이고, 더구나 현재 스위스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 인정되고 있는 적극적 존엄사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전이 아니라 사회적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구상하였다. 그리고 적극적 존엄사나 소극적 존엄사를 불문하고 이 문제는 모두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무거운 법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소설은 이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우리에게 친숙한 ≪피터 팬≫ 동화에 접목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동화적인 구성과 스토리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10여 년 전,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고 쓰는 과정에 저자는 3종의 『피터 팬』 동화책을 비롯하여 대략 10여 권이 넘는 도서와 기타 존엄사와 관련한 법률 논문, 판례평석 등 자료를 참고하였다. 그러나 이들 참고문헌은 소설에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소설 속 줄거리나 작중인물의 행위로 용해되거나 체화되었기에 따로 소개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브런치에 연재한 동명의 이 소설은 처음 이 소설이 출간(2014년 존엄사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출간되었고, 현재도 시중에 책이 나와 있다)된 이후 독자들로부터 지적받거나 저자 스스로 발견한 논리적 오류를 바로잡고, 소설의 줄거리 전개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부분은 일부 삭제하여 다시 수정한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개정판을 다시 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위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울러 존엄사법의 제정 여부를 떠나 잘 사는 일(Well Being) 못지않게 잘 죽어야(Well Dying) 하는 문제는 인간과 인류문명이 존속하는 한 계속 사회적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처음 출간했을 때 쓴 <작가의 말> 일부분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이 무더운 여름날의 한줄기 소나기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소나기를 내리는 작은 구름 한 조각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글이 맑은 가을날의 푸른 창공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하늘의 어느 한 귀퉁이라도 엷게 물들일 수 있는 한 방울 푸른 물감이라도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이 글이 꽁꽁 언 겨울 추위를 막아주는 따뜻한 외투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외투를 만드는 옷감의 한 올 실이라도 될 수 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 속 토끼섬 아이들이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엄마별의 얘기를 듣다 깜빡 졸아 바다에 떨어진 아기별
그 별을 건져 올리는 우리 가슴속 생명의 그물
이 글이 그런 그물의 한 코라도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마음과 영혼이 맑은 바람이게 하소서.
그 바람이 어두운 세상의 하늘에 내리는
소통과 나눔의 비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비를 맞은 사람들이 눈물 젖은 시선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