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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May 10. 2023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27화  후크 선장의 약속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27화 후크 선장의 약속           



11월 하순으로 접어든 초겨울이라 잎은 이미 시들어 버렸을 시기였다. 철 지난 노란 들국화가 피어 있었다. 꽃잎 대부분은 이미 말라 버리고, 그나마 속에 남은 몇 잎이 아직 시들지 않고 새파란 바람을 맞으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꽃잎은 마치 소년에게 “왜 이제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라고 말하며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해풍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시들지 않고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들을 태워다 준 의사 선생님의 차가 굽이치는 도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야 소년은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의 몸을 다시 한번 담요로 여미고, 의자의 손잡이를 뒤에서 밀며 천천히 둔덕 뒤 논 가운데 길을 걸어 나왔다. 그때까지도 들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멘트 포장 농로를 걸어 나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나서니 멀지 않은 곳에 선착장이 보였다. 소년은 선착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몇 대의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지만, 어느 차도 소년에게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선착장 쪽에서 갯내가 어린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아빠, 이제 바다에 거의 다 왔어.

(― 그렇구나. 이제 가슴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다.) 

― 오늘 밤에 해적놀이할 거지?

(― 그럼, 당연히 해야지.) 

― 네버랜드 아이들도 기다리고 있어. 지난주 일요일, 내가 아이들에게만 미리 살짝 말해 두었어. 오늘 후크 선장이 갈 거라고. 선생님께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 그래, 잘했다.)


소년은 지난주 일요일 아이들이 병원에 왔을 때를 떠올리며 빙긋 미소 지었다.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이 병실을 나간 뒤였다. 소년이 말했다.


― 어젯밤에 후크 선장이 말을 했어.

― 정말?


어린 마이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무슨 말을 했는데?


웬디가 말했다.


― 다음 주 일요일 해적놀이하러 집에 갈 거라고 했어. 너희들도 한 번 들어 봐. 

― 어떻게?

― 이렇게 하면 후크 선장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소년이 침대에 누운 후크 선장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 귀양살이 바위에 귀를 갖다 대면 인어들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후크 선장의 가슴에 귀를 대봤어. 그랬더니 정말 후크 선장이 말을 하고 있었어. 해적놀이하러 가자고. 지금도 말하고 있어. 너희들도 한 번 들어 봐.

― 정말?


먼저 마이클이 소년이 한 것처럼 후크 선장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 맞아. 쿵쿵 해적놀이, 쿵쿵 해적놀이, 이렇게 말하고 있어.


다음으로 존이 따라 했다.


―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 어, 정말이네. 쿵쿵 해적놀이, 쿵쿵 해적놀이.


다음으로 슬리와 투틀즈가 동시에 이마를 맞대고 귀를 갖다 대었다. 


― 쿵쿵, 해적놀이, 쿵쿵 해적놀이, 정말이야.


마지막으로 웬디가 따라 했다. 


― 쿵쿵 해적놀이, 쿵쿵 해적놀이, 맞아. 

― 그럼 다음 주 일요일에는 여기 오지 말고 해적놀이 준비를 하고 있어. 내가 후크 선장을 집으로 데려갈게. 선생님은 서울에 가신다고 했어. 우리끼리 해적놀이를 한다면 선생님께서 샘을 낼지도 몰라. 선생님께는 절대로 말해선 안 돼.


소년은 일일이 아이들과 새끼손가락을 걸어 다짐을 주었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지금쯤 아이들은 해적놀이 준비를 마치고 소년과 후크 선장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린 마이클은 이미 나무칼을 허리에 차고 있을 것이다. 웬디는 제 방을 꾸미듯이 네버랜드 참호를 수리하고 있을 것이다. 슬리와 투틀즈는 모래사장에 모닥불을 피울 나무를 갖다 나르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휠체어를 밀고 도로를 따라 걸어가며 후크 선장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 후크 선장, 오늘은 시계소리를 내지 않겠어. 오늘은 정정당당하게 맞붙을 거야.

(― 꼬마 피터 팬, 시계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넌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어.)

― 그렇지 않아. 나에게는 팅크 벨의 금가루가 있어. 

(― 그것도 소용없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방법은 나도 알아.)

― 어떻게?

(― 그건 비밀이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소년은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승선권 두 장을 샀다. 그것은 여름 방학식 날 학교로 찾아온 어머니가 소년에게 주고 간 것이었다. 이윽고 토끼섬으로 가는 배가 도착했다. 토끼섬을 경유하여 다른 여러 섬을 돌아 다시 선착장에 회항하는 여객선이었다. 토끼섬으로 가는 사람은 소년밖에 없었다. 소년이 모르는 이웃 섬사람들 몇몇과 낚시꾼 몇 사람이 배에 올랐다. 낚시꾼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앉은 휠체어를 통째로 들고 배에 올랐다. 서쪽 하늘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꽤 차가웠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 아빠, 추워? 선실로 내려갈까?

(― 아니, 시원하다. 그냥 여기 그대로 있자. 여기 이 갑판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구나.)


소년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갑판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른 섬사람들이 소년과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배가 점점 토끼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창가에 아이들이 나와 있었다.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안심했다. 소년의 예상대로 이번 주에는 서울 집에 간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소년과 후크 선장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병원을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탈출 계획 자체가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년이 생각한 것처럼 어린 마이클은 허리에 나무칼을 차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는 나나의 모습도 보였다. 소년도 손을 흔들었다. 마을 사람 몇몇이 함께 나와 있었다. 그러나 남자라고는 또복이 할배 혼자였다. 이윽고 배가 도착했다. 낚시꾼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들고 배에서 내렸다.


― 이를 우짜노, 이를 우짜노, 아이고! 아이고! 영 반송장이 다 되어 삐릿네.


아버지의 모습을 본 또복이 할매가 안타까운 마음에 연신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란을 떨었다.


― 너거는 마 빨리 집에 가서 방부터 데피라.


또복이 할매가 웬디 어머니 등 마을 사람들을 재촉했다. 소년은 휠체어를 끌고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소년을 따랐다.


― 대장, 오늘 진짜 해적놀이할 거지?


마이클이 나무칼로 휠체어의 바퀴를 두드리며 말했다.


― 그래, 후크 선장이 오늘 밤 하자고 했어.


소년이 말했다. 모래사장이 나왔다. 모래사장에 모닥불을 피우기 위한 나뭇더미가 쌓여 있었다. 참호 위에 얼기설기 엮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 우리가 벌써 준비해 놨어.


투틀즈가 퉁퉁한 볼을 흔들며 씩 웃었다.


― 아빠, 내 말이 맞지? 아이들이 미리 준비해 놓았을 거라고 했잖아. 


소년은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 그렇구나. 오늘은 정말 신나는 해적놀이가 되겠어.)


소년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석양이 묻은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배 위에서는 바람이 꽤 불었지만, 오른쪽 방파제와 왼쪽 귀양살이 바위 사이에 오목하게 자리 잡은 모래사장 앞바다는 비교적 잔잔했다. 스러지는 저녁 하늘이 잠긴 바다는 마지막 빛으로 붉은 주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은 모래사장 위쪽 들길을 지나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이른 서리를 맞아 말라 있었다. 방안은 그대로였다. 방 한구석에 개어 놓은 이불과 작은 장롱, 그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언제 다녀갔는지는 모르지만, 가지런하게 정리된 방안에는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엄마는 없는 방안은 휑하니 썰렁했다.


― 밥도 몬 묵었제? 너거는 뭐하노. 어영 밥부터 해먹이자.


또복이 할매가 연신 물걸레로 마루를 훔치며 말했다.


― 자자, 춥다. 어영 이불 깔고 눕히라. 아이고, 아이고, 이를 우짜노, 영 사람도 몬 알아보네.


소년과 함께 또복이 할배가 아버지가 앉은 휠체어를 방까지 끌고 들어와 요에 누이며 연신 혀를 찼다. 오랫동안 비워 둔 집의 거실 싱크대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또복이 할배가 굽은 허리를 뒤뚱이며 물을 길어왔다. 투틀즈와 슬리의 어머니가 먼지가 하얗게 앉은 마루를 청소하고, 웬디 어머니가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안쳐 저녁상을 마련했다. 김치 등 반찬거리도 웬디 어머니가 집에서 가져왔다. 그러는 사이에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소년은 아이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었다. 어른들은 아예 밥 먹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연신 안타까운 표정으로 밥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머니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각오는 하고 왔지만, 정작 밥숟갈을 입으로 가져가려니 소년은 그만 목이 메었다. 그러나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 대장, 해적놀이 안 하는 거야?


밥을 먹자마자 어린 마이클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 야가 무신 소리를 하노? 이 야밤중에 해직놀이는 무신 해직놀이?


또복이 할매가 펄쩍 놀라 소리쳤다.


― 그래, 씨방 마이 디제(지금 많이 힘들지)? 이제 고마 좀 쉬어라. 낼 아침에 오마.


또복이 할매가 이어 말하며 일어섰다. 웬디 어머니랑 다른 사람들도 일어섰다.


― 해적놀이한다고 해놓고, 씨이~ .


어린 마이클이 볼멘소리로 씩씩대며 일어섰다.


― 니가 고마 할 소리를 해라.


웬디 어머니가 어린 마이클의 손을 잡아끌고 방문을 나서며 말했다. 소년도 인사를 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동쪽 먼바다에서 달님이 하얀 이마를 내밀고 있었다. 그때까지 마당에서 혼자 서성이던 또복이 할배가 앞서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 나오지 말거라. 아부지나 잘 샐피거라.


배웅하기 위해 모래사장까지 따라 나온 소년을 보고 또복이 할매가 말했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모두 달빛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나가 소년과 아이들 사이에서 컹컹거리며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들을 뒤쫓아 달려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투틀즈와 웬디가 뒤를 돌아다보더니 두 손을 입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동작으로 무엇인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았다. 그들은 곧 돌아올 것이다. 나중에 어른들이 잠들면 몰래 빠져나와 해적놀이를 하러 올 것이다.


소년은 한동안 모래사장 위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은 바다는 잔잔했다. 밀려온 물결이 쓸려가면서 물가의 조약돌이 자르르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달빛을 받아 은물결로 반짝이는 바다 수면이 새삼 신비롭게 보였다. 소년은 방파제 쪽 모래사장 끝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낡은 목선이 밧줄에 묶인 채 작은 물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발동선을 산 이후로 아버지는 목선을 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목선은 여전히 거기에 묶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아버지의 육체 같았다.


소년은 달빛을 등에 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요 위에 누워 있었다. 마치 시신처럼 누워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다행히 심장 소리는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병원에서 들은 것보다 훨씬 더 작았다. 금방이라도 멈추고 말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심장소리가 멎기 전에 물어보아야 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 아빠, 이제 해적놀이하러 갈까?

(― 그래, 얘야. 바다가 보고 싶구나.) 

― 아빠의 배가 있었어. 예전에 아빠가 타던 목선 말이야.

(― 그래, 다행이구나. 해적놀이에 후크 선장의 배가 없으면 안 되지.)

― 발동선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 아니야. 진짜 해적놀이에는 그 목선이 더 잘 어울려. 원래 후크 선장의 배는 발동선이 아니었어. 커다란 돛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범선이었어.) 

― 그래, 졸리 로저호는 발동선이 아닌 돛배였어. 내가 깜빡했어.

(― 날 태워다오. 나를 그 목선에 태워다오.)


― 아빠, 돌아올 거지?

(― 그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 언제?

(― 잠시 후, 바람이 불면, 나는 후크 선장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검은 해적 깃발을 힘차게 나부끼며 돌아올 것이다.)

― 그럼 기다릴게. 네버랜드 참호에서 후크 선장을 기다릴게.

(― 꼬마 피터 팬, 단단히 대비하고 있어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네버랜드를 함락시키고 말겠다.)

― 후크 선장, 이 피터 팬이 있는 한 절대로 네버랜드는 함락되지 않아.


소년은 아버지의 몸을 담요로 감싸다시피 덮었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일으켜 다시 휠체어에 태웠다. 소년은 아버지가 앉은 휠체어를 밀고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내려와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소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을 들어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수면 위에는 막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하현달이 시리도록 하얀 달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소년은 모래사장으로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휠체어 바퀴가 구르는 모래 위에도 하얀 달빛이 부서졌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따금 휠체어 바퀴가 모래에 빠져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낑낑대고 용을 써가며 달빛을 걷어 내고 휠체어를 밀었다. 이윽고 소년은 아버지의 목선이 묶여 있는 방파제 옆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소년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숨을 고르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얀 달빛이 내려앉은 바다 위 수면은 마치 은빛 주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그 바다는 아버지가 숨 쉬던 아버지의 바다였다. 은빛 물결 주단 주름이 쏴, 하는 물결 소리를 내면서 모래사장을 적시며 밀려왔다가 자그르르, 하는 조약돌 소리를 내며 다시 쓸려갔다. 소년은 가슴으로 느꼈다. 아버지도 저 물결처럼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바다로 돌아가 바다와 같은 큰 숨을 쉬어야 한다. 바다가 곧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곧 바다이다. 바다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소년은 수면 위에서 가볍게 일렁이며 떠 있는 아버지의 목선을 바라보았다. 그 목선은 아버지의 분신이었고, 해적선 졸리 로저호였다. 소년은 목선이 묶여 있는 밧줄을 끌어당겼다. 배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수면 위에서 쉽게 끌려왔다. 그러나 배의 바닥이 모래에 닿자 더 이상 잘 끌려오지 않았다. 소년은 뱃머리가 모래사장 위에 반쯤 올라올 때까지 다리와 허리를 뻗대고 낑낑거리면서 배를 끌어당겼다.


소년은 먼저 아버지를 덮고 온 담요를 걷어 목선 바닥에 깔았다. 휠체어에서 아버지를 안아 들었다. 아버지의 몸은 병원에서 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소년은 아버지의 발끝이 뱃머리로 향하도록 조심스럽게 담요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허리 뒤에 노를 가로질러 대어 노끈으로 묶고 아버지가 노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게 했다. 바닥에 펼쳐진 여분의 담요 자락을 접어 올려 아버지의 몸을 감쌌다.


소년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바짓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는 뱃머리를 잡고 다시 뒤로 밀어 돌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맨발과 종아리를 적시며 타고 올라온 은빛 물결이 상체로 번지면서 소년의 가슴과 머리도 온통 은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뱃머리가 먼바다로 향하도록 배를 돌린 소년은 다시 뒤로 돌아와 배꼬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었다. 드디어 모랫바닥을 벗어난 배가 수면 위에 둥실 떴다.


이제 아버지는 목선 위에 가로지른 노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시리도록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먼 수평선을 잔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달빛은 아버지의 시선에도 내려앉고 있었다. 아버지의 입가에 달빛 같은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소년은 종아리가 완전히 물에 잠길 때까지 배를 밀고 바다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수면에 드리워진 배에 묶인 정박용 밧줄을 건져 올려 둘둘 말아서 뱃머리 바닥에 놓았다. 그 밧줄은 후크 선장이 된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배를 정박할 때 필요할 것이었다.


소년은 물속에 가만히 서서 아버지의 배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가로 나왔다. 썰물이었다. 아버지가 탄 배는 가볍게 흔들리며 점점 멀어져 갔다. 수면 위에서 반짝이며 부서지는 은빛 물결 조각처럼 아버지가 탄 목선도 빛의 물결을 타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은빛 물결 주단이 깔린 수면 위를 잔물결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하얀 빛의 조각이 되어 먼 수평선을 향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소년은 몸을 돌려 양말과 운동화를 다시 신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네버랜드 참호로 들어갔다. 이제 바람이 불면 아버지는 후크 선장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때 방파제 쪽으로 난 마을 길에서 아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었다. 달빛에 비친 그림자만 보아도 그들이 웬디와 존, 마이클, 투틀즈, 슬리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깡충거리는 나나의 앙증맞은 그림자도 보였다. 


― 이리 와.


소년이 참호에서 나와 아이들을 부르며 손짓했다.


― 피터 대장이다.


어린 마이클의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소년이 있는 참호로 달려왔다.


― 후크 선장은?


투틀즈가 물었다.


― 바다로 갔어. 저기를 봐.


소년이 바다를 가리켰다. 아버지가 탄 목선이 먼바다 위 달빛 속에서 하얀 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 정말 후크 선장이 타고 갔어?


어린 마이클이 물었다.


― 그럼, 저기 배 위에 후크 선장이 앉아 있잖아.

― 후크 선장이 진짜 돌아올까? 


존이 물었다.


― 잠시 후 바람이 불면 돌아온다고 했어. 후크 선장에게 물어봐.

― 저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물어?

― 선생님이 말했잖아. 별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 오늘은 별이 없는데? 달 뿐인걸. 


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 별은 달빛 뒤에 숨어 있어. 그러나 달도 얘기할 수 있어. 여기에 누워 달님에게 한번 물어봐. 


소년이 말했다. 아이들이 참호 속에서 고개를 젖히고 달을 바라보았다. 웬디가 손으로 동그란 나팔을 만들어 말했다.


― 달님, 달님, 후크 선장은 언제 돌아오나요?

(― …….) 

― 방금 후크 선장이 말했어. 잠시 후 바람이 불면 돌아온다고. 마이클, 달빛을 타고 들려오는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소년이 말했다.


― 응, 들려. 


마이클이 말했다.


― 나도 들려.


존이 말했다.


― 그래 맞아. 후크 선장이 바람이 불면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있어.


투틀즈와 슬리가 동시에 말했다.


― 커다란 돛이 달린 해적선이라고 해. 내 귀에도 들려.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 정말 후크 선장이 달님에게 얘기하고 있어. 달님이 우리에게 얘기해. 


웬디가 말했다. 후크 선장은 돌아올 것이다. 커다란 돛이 주렁주렁 달린 해적선 졸리 로저호를 타고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아이들은 참호에서 고개를 내밀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바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크 선장이 탄 목선은 달빛에 스며들어 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적막한 달빛만이 고고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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