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피터 팬, 기지를 발휘하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강 검사의 전화를 받은 그날 석간신문에 나의 검찰 소환 사실이 보도되었다. 식물인간 아버지를 목선에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내 살해한 비정한 소년의 이야기는 이미 전국적 이슈가 되어 있었다. 신문을 본 김 과장이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왔다. 처음에는 싸늘한 눈초리로 화를 내던 김 과장도 이제는 이렇게 된 일이 모두 자기 때문인 것처럼 미안해했다. 퇴근하니 아내도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 모두 다 잘될 거야. 아무 걱정하지 마.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아내의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추어 나는 검찰청으로 갔다. 원장은 병원이 언론에 노출되어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도록 원무과장을 시켜 나를 검찰청사까지 다른 차로 태워다 주도록 했다. 그러나 내가 탄 차가 검찰청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서자, 어떻게 알았는지 보도진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연신 펑펑 터트리며 마이크를 들이밀고 질문을 했다.
― 혐의 사실을 인정하는 겁니까?
― 소년과 함께 환자를 병원에서 내보낸 것이 맞습니까?
― 어떻게 병원에서 나왔습니까?
― 보호자도 없었다는 것이 맞습니까?
― 한 말씀해 주시죠?
이들의 태도로 보아 나는 이제 천하에 둘도 없는 파렴치범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검찰청 직원들이 달려 나와 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말없이 보도진 사이를 지나 청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검찰청 직원 한 사람이 나를 안내했다. 나는 청사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 307호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강 검사 혼자 있었다. 검찰 수사관이나 다른 여직원도 없이 검사 혼자 앉아 있었다. 나보다도 더 젊은 삼십 대 초반의 남자였다. 패기만만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그 표정이 이제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강 검사가 말했다.
― 박 과장님이십니까?
― 예, 그렇습니다.
― 경찰청 복도에서 쓰러졌다고 하던데, 몸은 회복되었습니까?
― 예, 견딜 만합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 자, 이쪽으로 앉으시죠.
책상 앞에 놓인 바퀴 달린 의자 두 개 중 하나를 가리키며 강 검사가 말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강 검사가 느긋하게 말했다.
― 시작하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보도진들이 이렇게 몰려올 줄은 우리도 몰랐습니다. 놀라지는 않았습니까?
강 검사가 일어나 정수기 위에 놓인 인스턴트커피 봉지를 가위로 잘라 종이컵에 붓고는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탔다.
― 고맙습니다. 좀 당황하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강 검사가 내미는 커피를 받아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드디어 강 검사가 사건과 관련하여 입을 열었다.
― 경찰에서 한 진술을 여기서도 반복하겠습니까?
강 검사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거짓말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빨리 자백하는 것이 서로에게 덜 피곤하지 않겠냐는 투로 내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돌변한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 경찰에서 있었던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 그래요? 무의미한 실랑이는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 자리를 옮길까요? 함께 가시죠.
강 검사가 일어섰다. 이곳에서 조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강 검사를 따라 일어섰다. 강 검사가 왼편 복도를 따라 걸어가더니 어느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출입문 우측 벽에 ‘특별조사실’이라는 세로로 된 나무 입간판이 붙어 있었다.
― 자, 들어가시죠. 이곳에서 조사하게 됩니다.
나는 강 검사를 따라 특별조사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중앙에 직사각형 책상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역시 바퀴 달린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 자, 이곳에 앉으시죠.
강 검사가 책상 앞에 놓인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강 검사가 양복 윗도리를 벗어 구석에 세워진 옷걸이에 걸고는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 지금부터 피의자의 살인 등 혐의에 대한 정식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피의자는 불리한 사실에 대하여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피의자는 신문에 응하겠습니까?
― 예.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강 검사가 나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강 검사가 내 이름과 주소 등 몇 가지를 먼저 물었다.
― 오래 끌지 맙시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부인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강 검사가 책상 서랍을 열고 누런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그 봉투에서 내 지갑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버틸 것이다. 강 검사가 추궁했다.
― 이 지갑, 피의자 것이 맞지요? 지갑에 신분증이랑 신용카드가 고스란히 있는데, 설마 이것마저 부인하지는 않겠지요?
― 이 지갑이 어떻게 여기에 있습니까?
― 그애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백했어요, 피의자가 주었다고. 이제 더 이상 실랑이하지 맙시다.
강 검사가 타이르듯 말했다.
― 내가 지갑을 그애에게 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 정말 끝까지 이러실 겁니까?
강 검사가 화난 음성으로 대뜸 쏘아붙였다.
― 그애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게 고집부릴 일이 아닐 텐데요. 피의자의 차를 타고 병원을 나왔다고 그애가 모두 자백했습니다. 순순히 자백하면 정상 참작이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당신 정말 안 되겠어.
강 검사가 벌떡 일어나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그애가 모두 자백했다고? 경찰도 그렇게 말했었다. 경찰에서 자백했으면 그때 소년과 대질시켰을 것이 아닌가? 지금도 소년은 이 자리에 없다. 경찰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년이 자백했다면 소년부터 이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바로 대질시킬 것이 아닌가? 악질 애새끼보다 더하네. 악질 애새끼……. 그래, 소년은 여기서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가자.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가보자.
― 그애를 불러 주십시오. 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했는지 내가 한 번 물어봅시다.
나도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 강 검사에게 소리쳤다.
― 좋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우긴다면 소원대로 해드리죠.
그렇게 말한 강 검사가 대뜸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 강 검삽니다. 애를 데려오세요. 특별조사실입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드디어 소년과 나를 대질시키는 것으로 보아 강 검사의 말이 사실인지 모른다. 그애가 정말 자백했다면? 10분쯤 후, 교도관이 정말 소년을 데리고 들어왔다. 푸른 수의 소매 밖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홀쭉하게 살이 빠진 얼굴에 눈만 커다랗게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과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정색하더니, 다시 눈에 힘을 주고 오히려 나를 쏘아보았다. 이 눈빛은?
― 이리 와 앉아.
강 검사가 대뜸 호통을 쳤다. 소년이 쭈뼛쭈뼛 걸어와 내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조금 전의 그 강렬한 눈빛과는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소년의 눈에서 이내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눈물은? 그래, 자백하고 말았구나. 절대로 나는 처벌받지 않게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나는 지레짐작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동안 단단히 붙들고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강 검사의 말대로 더 이상 버텨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 경찰이나 검사의 추궁에 이 어린애가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검사의 호통 한 마디에 곧바로 술술 불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리석었다.
자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가? 경찰과 검찰이 어디 허수아빈가? 나는 깊숙이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뿜었다. 그래, 이제는 어쩔 수 없다. 내 지갑이 발견되었고, 자백한 증인이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더 이상 우겨 보았자 승산 없는 싸움이다. 강 검사의 말대로 서로에게 피곤한 일일 뿐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나는 병원비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호자도 없는 환자를 강제로 유기한 악덕 의사일 뿐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의 어린 아들과 공모하여 병원에서 강제로 내쫓아 죽게 만든 천하에 둘도 없는 파렴치한 살인 의사일 뿐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체념했다.
그때, 강 검사가 곧바로 나를 추궁했다면 나는 정말 자백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 검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년과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그때, 그 짧은 순간, 내 가슴을 쿵 하고 두드리는 어떤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 하나가 뇌성처럼 귀에 울렸다.
(― 존재의 진리를 믿으라고 하지 않았소.)
이게 무슨 조화인가? 후크 선장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 내가 미리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다.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그 소리에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아직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이윽고 강 검사가 의자를 책상 앞으로 바짝 당겨 앉고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 피의자……?
그때였다. 강 검사의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강 검사가 다음 말을 멈추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 예, 강 검삽니다.
― ……?
―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곧 가겠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통화를 끝낸 강 검사가 일어나 와이셔츠 소매를 여미고 양복 윗도리를 입으며 말했다.
― 청장님께서 급하게 찾는다고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말한 강 검사가 서둘러 조사실을 나갔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그렇지, 조사실에 교도관은 물론 다른 직원은 아무도 없는데, 조사받는 피의자들만 달랑 남겨 놓고 방을 나가다니? 만약 우리가 도망이라도 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나는 영문을 몰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무도 없는 방에 소년과 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는 내 처지는 잠시 잊어버리고 소년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래, 모든 것이 내 불찰이다. 그때 내 마음속에도 벌레 원장의 마음이 꽉 차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나는 해적놀이를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소년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어떻게든 환자를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들으면 실소를 금치 못할 어리석은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어찌 이 아이의 잘못인가? 모두 내 탓이다. 나는 자괴감에 떨면서 소년을 다독거려 주려고 손을 들었다. 그때 소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 의자 아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수갑이 채워진 두 손으로 내 바짓가랑이를 움켜잡으며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년의 돌출 행동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소년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채 여전히 소년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나? 모두 다 내가 잘못 판단한 내 어리석음이 초래한 일이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공범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아이를 살인범으로 만든 건 바로 나다. 내 어리석은 판단이 이 아이를 살인범으로 만들었다.
나는 앉은 채로 허리를 구부리고 팔을 뻗어 소년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때 내 종아리를 무엇인가 꼭꼭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바짓가랑이를 잡은 소년이 손가락 끝을 세워 종아리 뒤쪽 근육을 꼭꼭 찌르고 있었다. 그때야 나는 퍼뜩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잘못했다고 비는 시늉을 하며 무엇인가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처음 조사실에 들어올 때 보았던 소년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났다. 소년이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소년이 말했다.
―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선생님이 병원에서 내보내 주지 않아 제가 도망쳤어요. 아빠를 데리고…….
소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바짓가랑이를 잡은 손으로 다시 한번 내 종아리 뒷부분을 꼭꼭 찔렀다. 분명했다. 소년이 잘못을 빈다는 핑계로 엎드려 내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은 내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 그만 일어나거라.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 보기나 하자.
나는 소년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그때야 소년은 바짓가랑이를 잡은 손을 놓고 일어나 앉았다. 의자에 앉은 소년이 주먹 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 아빠가 계속 해적놀이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절대로 병원에서 내보내 줄 수 없다고 하고…….
― 그래서 할 수 없이 도망을 쳤다 이거야?
― 예, 아무리 말해도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해서.
내 종아리를 찌른 것이 이거였구나.
― 병실에서는 어떻게 나갔니?
― 일요일 날, 간호사 누나가 없는 틈을 타서 뒷문 계단으로 나왔어요. 정문으로 나오면 들킬 것 같아서.
―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어린 네가 어떻게 데리고 나갔어?
― 바퀴 의자에 태워서 끌고 나왔어요.
― 휠체어를 끌고 섬까지 간 것은 아닐 테고, 집에는 어떻게 갔어?
연극이다. 신명 나는 굿판이다. 소년이 주연이고 나는 조연이고…….
― 병원 뒷문으로 나와 숲속 산책길을 가로질러 큰 도로로 나오니 택시가 한 대 왔어요. 그 택시를 타고 갔어요.
아하! 내가 간과했던 특별병동으로 올라가는 도로 입구에 설치된 방범용 CCTV에 노출되지 않으려면 숲속 산책길로 나와야 한다. 내가 미리 살펴보지 않았던 이것까지 소년은 정말 예상했을까? 정말 탄복할 일이다.
― 무슨 돈으로 택시를 탔니?
― 선생님, 죄송해요. 집에 가려고 제가 선생님 지갑을 훔쳤어요.
모두 다 선생님을 위해서예요, 라며 차를 가로막다시피 하고 지갑을 달라던 소년의 맑고 진지한 눈빛이 떠올랐다. 아하,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소년은 내가 강 검사에게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지를 미리 가르쳐 주고 있었다. 소년이 이미 자백했다는 강 검사의 말은 기망술책이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존재의 진리, 후크 선장의 영혼에서 울리는 존재의 소리가 이런 대비책까지 암시해 준 것일까? 이것은 틀림없이 후크 선장의 계시에서 비롯된 소년의 연출일 것이다.
― 그래? 어디서 잃어버렸나 했더니, 네가 훔친 거였구나.
― 죄송합니다. 아빠와 해적놀이하러 집에는 가야 하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연극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때 소년은 둔덕 뒤 농로에서 나와 헤어지고 난 이후에 일어났던 일도 얘기했다. 나는 그 얘기는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소년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섬으로 간 소년이 그날 밤 마을 아이들과 함께 벌인 해적놀이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흠뻑 젖도록 속으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