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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Apr 27. 2023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24화 후크 선장과의 바위섬 대화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24화 후크 선장과의 바위섬 대화          



낯선 해안가였다. 밤이었다. 나는 해적들에게 생포되어 한 그루 나무에 묶여 있었다. 내가 묶여 있는 나무 앞에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이글거리는 불빛 속에서 상체에 온통 문신을 새긴 사내 하나가 망나니 칼을 들고 다가왔다. 그 사내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니 두 개가 빠진 데다 지저분한 수염에 덮인 흉측한 얼굴이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앞날이 넓은 망나니 칼날이 섬뜩했다. 사내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칼을 휙휙 휘두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칼날에 바람이 일었다. 검무를 추는 사내의 그림자가 불빛을 타고 일렁거렸다.


사내가 일순 동작을 멈추고 칼날을 내 목에 갖다 댔다. 잘 별러진 날카로운 칼날의 감촉에 오싹하는 전율이 일었다. 그 전율을 타고 칼 든 사내의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타오르는 불길을 가운데 두고 하나같이 흉측하고 사나운 모습을 한 해적들이 나를 둘러싸고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몸에 문신을 새기고 칼을 겨누고 있는 이 사내는? 그래, 빌 주크스였지. 그리고 팔뚝을 드러내고 술통 위에 앉아 있는 저 남자는 이탈리아인 쎄코. 양복 윗도리를 입은 저 사내가 바로 신사 스타키. 우스꽝스럽게 삼각 모자를 비뚜름하게 쓴 눈빛이 날카로운 저 사람은? 갑판장 스미.


그런데 후크 선장은? 나는 그렇게 생포되어 결박되어 있는 와중에서도 후크 선장을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저곳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며 후크 선장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울거리는 장작 불빛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모자를 쓴 아이가 검은 바다 물결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피터 팬이었다. 피터 팬이 휠체어를 끌고 검은 바다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후크 선장이었다. 피터 팬이 후크 선장을 휠체어에 태워 물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무슨 요술을 부리고 있는지, 피터 팬도 후크 선장이 앉아 있는 휠체어도 물에 빠지지 않았다. 피터 팬과 휠체어는 마치 갈매기가 물 위를 가볍게 스치듯 먼바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빌 주크스의 망나니 칼이 다시 춤을 추며 나에게 다가왔다. 윙윙, 번쩍거리는 칼날이 바람소리를 내며 내 목을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다급하게 외쳤다.


(― 안 돼, 살려 줘. 피터 팬, 가지 마. 날 구해 줘.)


꿈이었다.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 복도에서 쓰러지던 순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깜깜했다. 병실 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김 과장과 아내가 들어섰다. 김 과장의 창성병원인 모양이었다.


― 이런 꼬락서니라니!

―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에 있어? 

― 119구급차에 실려 왔다. 아무 생각 말고 며칠 푹 쉬어라. 자식들이 아주 생사람을 잡을 모양이구나. 날이 밝으면 내가 경찰서에 가볼게.


그러고 보니 내가 조사받았던 경찰서에서 이 병원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응급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그렇게 할 것 없어. 이제 끝났으니까. 그만 가봐야겠어.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가려 했다. 휘청거렸다.


― 그 몸으로? 오늘은 그냥 여기서 푹 쉬어.

― 그래요. 며칠간 푹 쉬어요. 병원 일은 당분간 잊어버려요.


아내가 말했다. 조사받던 생각이 되살아났다. 경찰은 이미 내 지갑을 확보해 두고 있다. 이제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나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몸과 의식이 송두리째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여전히 창성병원에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고 김 과장이 왔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김 과장이 말했다.


― 오늘 오후에 경찰서에 갔다 왔다. 

― 그곳에 네가 뭐 하러?

― 네가 정말 그런 건 아니지?

― 뭘 말이야?

― 그렇게 시침 뗄 일이 아니잖아? 경찰 수사관의 얘기를 들으며 설마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하지 않았지? 고귀한 죽음을 맞게 해 주자던 우리 약속 어기지 않았지? 

― 좋을 대로 생각해.


나는 체념 섞인 표정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 김 과장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참, 나,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네.


그 말투에는 약속을 어긴 나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나는 보호자도 없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의식불명 환자를 단지 병원비가 밀렸다고 강제로 퇴원시켜 죽게 만든 파렴치한 의사가 되고 만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며 침을 뱉을 것이다. 이제까지 내가 의사로서 쌓아 놓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의사면허까지 박탈될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살인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교도소에 갈지도 모른다.


― 그래,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참이야?


이번에는 김 과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김 과장이 다분히 장난 삼아 벌인 일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김 과장이 그것을 생각하고 미안함과 죄책감이 든 것 같았다.


다음 날, 나는 집으로 왔다. 아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아내만은 나를 이해하고 위로해 줄 것이었다. 내 편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어쩌면 아내도 김 과장과 마찬가지로 나를 파렴치한 의사로 취급할지도 몰랐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내 역시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치만 살피는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다시 사흘이 지났다. 나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다소 기운을 차린 나는 집을 나와 토끼섬으로 갔다. 섬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을은 조용했다. 병원에 왔던 아이들의 섬마을 분교가 궁금했다. 작은 교실 하나뿐인 학교 건물과 그곳에 딸린 작은 사택, 그러나 겨울방학 중이라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1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추운 날씨 탓인지, 마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인도 같았다.


나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을 왼쪽 바닷가 길을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소년과 아이들이 해적놀이를 했다는 모래사장이 나왔다. 그 모래사장의 왼쪽 끝에 아이들이 ‘귀양살이 바위’라고 이름 붙인 토끼머리 바위섬이 있었다. 나는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 그 바위섬 쪽으로 갔다. 마침 썰물이었다. 바위섬으로 가는 길이 열려있었다.


나는 듬성듬성 튀어 오른 바윗돌을 징검다리 삼아 그곳을 건너 바위섬으로 올라갔다.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면에서 내가 서 있는 곳까지의 높이는 어른 키의 서너 배는 될 것 같았다. 소년이 파도에 휩쓸리면서 매달렸다는 소나무가 차가운 해풍을 맞으며 바위섬 허리 틈새 바위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해적놀이하는 정경을 그려 보았다. 장작불을 가운데 두고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마을 사람들의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피터 팬이 나무칼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웬디, 존, 마이클, 슬리, 투틀즈가 함성을 질렀다. 빌 주크스, 쎄코, 스타키, 해적단 일원이 된 아이들의 아버지와 후크 선장이 아이들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스미 갑판장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 바위섬에서 인어들의 얘기를 듣는다고 했다. 별과 인어들을 통하여 먼 아프리카에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얘기를 듣는다고 했다. 소년의 아버지 후크 선장은 바다가 하는 말을 듣고 바다의 영혼을 느낀다고 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말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고, 또 믿는다고 했다. 마음을 모으면 느낌과 영혼이 열린다고 했다. 소년은 열린 영혼으로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 그런 소년의 부탁이었다.


내 판단이 진정 잘못된 것인가? 병원의 VIP실, 그곳은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곳이다. 물질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없듯이, 반드시 그런 최고급 병실에서 숨을 거두어야만 고귀한 임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귀한 죽음이란 물질보다 정신적 가치가 우선되는 영적인 삶의 종착지여야 한다. 물질의 안일을 거부하고 영적인 삶을 찾아 스스로 유배 생활을 선택한 후크 선장이었다.


그런 후크 선장이 과연 어느 곳에서 죽기 원했을까?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때 바위 아래 물결이 너울거리며 수면 위에 후크 선장의 모습이 나타나 물결에 일렁거렸다. 후크 선장이 먼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후크 선장에게 말을 걸었다.


― 후크 선장,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소?

(― 나는 바다에 있소.)


― 그 바다란 곳은 어떤 곳이오?

(― 자궁인 동시에 관이기도 한 곳이오.)


― 그게 무슨 소리요?

(― 바다란 생명이 탄생하는 어머니의 자궁이기도 하고, 죽은 자들이 돌아가는 관이기도 하다는 소리요.)


― 그럼 지금 당신은 자궁 속에 있소, 아니면 관 속에 있소? 

(― 오늘은 자궁 속에 있다가 내일은 또 관 속에서 놀기도 한다오. 바다에는 죽음과 생명이 공존한다오.) 


― 그런 당신은 편안하오?

(― 편안하다는 말은 육체와 정신이 존재하고 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오. 육체를 떠나고, 정신까지 초월해 있을 때는 그런 언어조차 부질없는 것이오.)


― 지금 당신은 그런 초월 상태에 있다는 말이오?

(―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는 육체와 정신에 종속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 유기체의 관점에서는 지금의 나의 상태를 초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유기체의 상태에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근원의 존재와 하나가 되었을 때는 초월이라는 언어도 부질없는 것이라오.)


― 근원의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오. 시간과 공간이 해체된 직관의 문제이지요. 아니, 직관의 문제도 아니오.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존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자아, 초월적 자아의 상태를 말하는 거요.)


― 그 말은 더욱 난해하여 나는 혼란스럽소.

(― 바다는 자기가 바다인지 모른다오. 하늘은 자기가 하늘인지 모른다오. 땅이 당신에게 ‘나는 땅이다’라고 말하던가요? 그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오. 바다를 바다라고 하고, 하늘을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육체와 정신에 종속된 살아 있는 유기체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오. 당신 같은 유기체들은 육체와 정신이 존재할 때의 상태를 생명이라고 하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초월적 자아의 상태에서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구별조차 부질없는 것이오. 시간조차 의미 없는 것이라오. 내가 곧 바다이고 바다가 곧 나인데, 나와 바다를 구별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나는 하늘인 동시에 땅이고, 빛인 동시에 어둠이기도 하다오. 생명인 동시에 죽음이기도 하지요. 굳이 당신들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존재의 초자연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 ‘존재의 초자연 상태’라고요? 그것은 또 어떤 것입니까?

(― 존재가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절대적 자유는 소멸해 버린다오. 왜냐하면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존재가 스스로 유기체라는 관념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두어 구속되어 버리기 때문이오. 존재가 존재 그 자체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초월적 상태가 바로 ‘존재의 초자연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 그런 말은 더욱 어렵소. 나는 철학자가 아니고, 철학적 지식이나 사유도 빈약하오. 그러나 이것만은 물어보고 싶소. 당신은 그런 ‘존재의 초자연 상태’가 되기 전, 아니 당신은 지금 ‘바다’가 되어 있다고 하니, 그냥 쉬운 말로 ‘바다’라고 합시다. 당신은 바다가 되기 전 당신의 아들, 그래요, 피터 팬이었지요. 그 피터 팬에게 당신을 바다로 데려가 달라고 얘기한 적이 있소?


(― 나는 얘기한 적이 없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 내 육체는 물론 의식조차 마비되어 있었지 않았소?)


― 그럼 그애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요?

(― 아니, 그렇지는 않소.)


― 그럼, 그애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요?

(― 그애는 존재의 근원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던 거요. 초자연 상태에 있는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거요. 그 소리를 듣고 그애는 그 말이 내가 하는 것이라고 잠시 착각했던 것이라오.)


― 그러면 당신이 하지 않은 그 말을 따른 나는 결국 나쁜 의사였다는 말이오?

(― 나쁜 의사라? 허허, 그 말이 참 우습게 들리오. 초자연 상태에서는 선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오. 선이나 악이란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관념에 도덕적 의미가 부여되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오. 그애는 그런 도덕적 의미가 배제된 존재 자체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오. 그런 존재의 소리를 유기체가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소?)


― 당신의 말에 의하면, 결국 그애의 말을 들은 내 행위도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오?

(― 그것은 존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오. 개개의 유기체가 고유한 존재의 소리에 제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또 제 나름의 기준으로 제각각 다른 판단을 한다고 하여, 그것을 존재가 어찌 막을 수 있겠소.)


― 당신은 금방 판단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판단을 막지 못한다고 하니, 나는 혼란스럽소.

(― 내 말은 존재의 판단 기준과 유기체의 판단 기준은 다르다는 것이오. 아니, 애당초 판단이라는 것은 유기체에만 해당하는 말이오. 그러니 유기체가 존재의 소리를 판단한다고 하여 존재가 개입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 결국 당신의 말은 내 행위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의 문제이고, 그 유기체의 판단에 나는 복종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그런 말은 듣지 않는 것만 못하오. 존재로서의 당신은 유기체로서의 나에게는 전혀 무용지물이군요.


(― 내 한 가지만 말하리다. 유기체도 존재의 일부라는 것이오. 그 어떠한 유기체의 판단도 존재의 진리를 능가하지 못하오. 당신은 지금 유기체의 세계에 있소. 유기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요.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유기체의 판단이 존재의 진리에 항상 부합하는 것은 아니요. 아니, 그것에는 항상 오류가 있소. 그것은 유기체의 숙명이지요. 유기체로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한계 말이오.


당신의 행위가 존재의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였다면 당신은 그것으로 떳떳하오. 오류투성이로 가득 찬 유기체의 판단을 비난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해서도 안 되오. 당신이 그러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애가 들은 존재의 소리에 당신의 영혼이 감응했기 때문이오. 그것은 당신의 내면이 그만큼 순수하다는 증거이지요.


순수한 아이들이 영혼의 소리에 쉽게 감응하듯이 당신의 내면이 아이처럼 순수했기 때문에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오. 당신은 존재의 소리를 들은 그애의 말을 따랐고, 그런 모습이 존재를 갈구하는 유기체의 참모습이라오. 참모습은 존재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유기체에게도 아름다운 법이라오. 그 유기체가 비록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오.)


차가운 해풍에 파도가 일렁거렸다. 후크 선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살아 있는 유기체의 관점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시오. 존재의 진리를 믿으시오. 미리 포기하지 마시오. 내 아들이 내 영혼의 소리에 따랐던 것처럼.)


― 그러면 나는, 그리고 당신의 아들은 어떻게 되오?

(―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러나 당신의 행동이 존재의 진리에 맞는 행위였다면, 당신은 그것으로 떳떳하오. 삶과 죽음, 그것은 자연의 순리이자 섭리라오.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라오.)


차가운 해풍에 파도가 몰아쳤다. 후크 선장이 다시 한번 손을 흔들며 말했다.


(― 두려워 마시오. 당신은 훌륭한 의사였소. 내 아들도 제 나름의 판단과 신념대로 살아갈 것이오. 존재의 진리에 부합하는 그런 신념으로 말이오. 그 신념이 내 아들을 지켜 줄 것이오.)


토끼머리 바위섬에서 만난 후크 선장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후크 선장의 모습이 일렁이는 물결과 함께 사라졌다. 갑자기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나는 기분이 들더니, 이상하게도 편안해졌다. 차가운 바닷바람에도 별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불안이 씻은 듯 사라지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바위섬을 내려와 다시 모래사장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언덕 위에 후크 선장의 빨간 벽돌집이 보였다. 여전히 폐가가 된 채로 방치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집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집과 토끼머리 바위섬 중간 어귀 지점에 새로 생긴 무덤 하나가 보였다. 혹시? 나는 그 무덤으로 갔다. 내 추측대로였다. 봉분 앞 작은 평판 묘석에 후크 선장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 그의 무덤을 조성한 것 같았다.


나는 상가(喪家)에서 문상을 하듯이 후크 선장의 봉분 앞에 엎드려 두 번 절했다. 두 번째 절을 하고 일어서는 순간 경찰서 복도에서 쓰러지기 직전, “그 악질 애새끼보다 더하네요.”라고 말하던 형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 그 말의 의미는? 형사는 왜 소년을 악질 새끼라고 했을까?


소년이 끝까지 무엇인가 부인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소년이 내 지갑의 출처를 실토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소년은 분명히 말했었다. 내 지갑을 가져가는 것은 모두 나를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희망은 있다. 소년을 의심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출근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진료실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 창성지검의 강 검삽니다. 307호실로 좀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 언제 갈까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이제까지 미뤄 두고 있던 일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는 그런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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