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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Apr 18. 2023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23화 피터 팬의 공범은 누구인가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제23화 피터 팬의 공범은 누구인가          



다음 날 경찰 10여 명이 압수수색영장을 가지고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압수수색이었다. 경찰은 특별병동은 물론이고 일반병동의 CCTV 녹화 테이프 원본과 환자의 진료기록부, 회계장부 등을 모조리 압수해 갔다. 원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벌벌 떨었다. 그 와중에도 숨겨둔 이중장부는 압수되지 않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후, 이 간호사가 참고인으로 경찰서에 불려 갔다. 오전 출근과 동시에 경찰서에 간 이 간호사는 퇴근 무렵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경찰 수사관이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묻더라고 했다. 사색이 되어 돌아온 이 간호사가 자신이 조사받은 내용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 환자가 없어진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나요?

― 오후 두 시 반경쯤이었습니다.

― 그때 참고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 박 과장님이 일반병동 응급실로 잠시 내려오라고 해서 거기에 가 있었습니다.

― 박 과장님이란 누구를 말하는가요? 

― 그날 당직의사이신 저희 병원 신경외과 과장님이십니다.


― 박 과장은 무슨 일로 참고인을 거기로 오라고 했던가요?

― 어디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그동안 응급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 박 과장이 어디를 간다고 하던가요?

― 어디에 간다고 특정한 장소를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 그 환자는 어떤 환자였나요?

― 창성병원에서 전원해 온 환자였는데, 올 때부터 전신마비에다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 그 환자의 보호자는 있었던가요?

― 중학 일 학년 아들이 있었습니다.

― 다른 보호자는 없었는가요?

― 없었습니다.

― 그런 환자가 어떻게 특별병동 최고 VIP실에 입원하게 되었는가요? 

― 거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저는 모릅니다. 

― 그 환자는 병원비를 내지 않았지요?

― 예.


― 병원비를 내지 않아 어린 학생에게 강요하여 강제 퇴원시킨 것은 아닌가요?

― 그에 대해서도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 그런데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가 어떻게 병원을 나갈 수 있었나요?

―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그날 응급실에서 돌아와 보니 환자가 없어졌습니다.

― 병원비도 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돈을 낼 경제적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강제 퇴원시킨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 그 이전부터 원장은 그 환자를 빨리 내보내라고 지시했다는데, 맞는가요?

― 저는 잘 모릅니다. 저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 그 환자의 담당의사는 누구였나요?

― 박 과장님이었습니다.

― 박 과장이 그 환자를 내보내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나요?

― 없었습니다.

― 환자가 없어진 시간에 참고인은 응급실에 있었고, 박 과장은 병원에서 나갔단 말이지요?

― 예.  

    



이 간호사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심장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다시 이틀 후, 아침 일찍 원무과장이 경찰서에 불려 갔다.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서 돌아온 원무과장의 얼굴도 사색이 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원무과장은 아무래도 경찰은 병원에서 강제로 환자를 내보낸 것으로 의심하는 것 같다고 했다. 특히 환자가 언제 없어졌는지, 병원에서 환자에게 퇴원을 종용한 사실이 있는지, 환자를 내보내라는 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는지 등에 대하여 집요하게 캐묻더라고 했다. 


원무과장이 조사받은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그 환자에게 보호자가 있었는가요?

― 중학교 일 학년 아들이 있었습니다. 

― 다른 보호자는 없었나요?

― 어머니가 있다고 했는데 오지 않았습니다.

― 그 환자는 병원비를 냈는가요?

― 한 번도 내지 않았습니다.

― 현재까지 밀린 병원비는 얼마인가요?

― 정확한 액수는 지금 자료가 없어 모르겠고, 그 병실은 특실 중의 최고 VIP실이라 상당한 금액에 달할 겁니다.


― 환자의 강제 퇴원을 막기 위해 아이들이 병실에 휘발유 화염병을 넣어 두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 예,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들이 물감을 탄 물병으로 우리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 특별병동에 있던 다른 환자들이 그 환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퇴원하겠다고 하면서 병원에 항의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 예,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실제로 그것 때문에 퇴원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도 사실인가요?

―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들이 병원에 있을 때 조기 퇴원한 환자는 있었습니다.


― 참고인은 그 환자가 없어진 것을 언제 알았는가요?

― 월요일 아침, 출근한 직후입니다. 

― 병원 원장이 참고인에게 그 환자를 내보낼 방안을 알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 예, 사실 원장님은 처음에는 그 환자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참고인이 원장의 지시를 받고 환자를 강제로 내보낸 것이 아닌가요?

― 아닙니다. 원장님이 그런 지시를 한 적은 있었지만, 강제로 내보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원장이 참고인 이외의 다른 누구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나요?

― 그것은 모르겠습니다.


― 담당의사인 박 과장에게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은 없었나요?

― 사실 처음에는 원장실에서 박 과장님에게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하지 않느냐고 야단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 그 무슨 조치라는 것이 환자를 강제로 내보낼 방안을 말하는 것이지요?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 야단을 맞은 박 과장의 태도는 어땠나요?

― 박 과장님이 원장에게 따졌습니다. 

― 어떻게 따졌다는 말인가요?

― 만약에 보호자도 없는 환자를 내보내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박 과장님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 참고인은 박 과장을 두둔하기 위하여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 아닙니다. 박 과장님은 실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내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입니다.

―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 환자는 병원비를 내지 않고 있었지요?

― 예.

― 그 병실의 다른 환자들도 그 환자를 내보내라고 병원에 항의하고 있었지요?

― 예.

― 그 환자는 병원비를 낼 경제적 능력이 없었지요?

― 예.

― 원장은 그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지요?

― 예.


― 원장은 참고인과 박 과장에게 그 환자를 내보낼 방안을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지요?

― 예.      

― 그 병실에 있던 아이들은 환자를 지키기 위하여 가짜 휘발유병으로 소동을 벌인 적이 있지요?

― 예.

― 그런데 환자는 없어졌지요?

― 예.

― 참고인, 이제 바른대로 말하세요. 이래도 병원에서 그 환자를 강제로 내보내지 않았단 말인가요?

―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강제로 내보낸 것은 절대 아닙니다.


―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요?

― 병원에서는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특히 원장님은 그 환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나서는 환자를 꼭 살려내야 한다면서 병원비 따지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 그 환자가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 그 환자는 폭풍우 속에서 바위섬에 고립된 섬마을 아이 다섯 명을 구조하고 파도에 휩쓸려 전신마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원장님은 그런 의로운 사람을 나라에서 돌보지 않는다면 자기라도 나서서 돕겠다고 했습니다. 원장님은 평소 도내 극빈자들을 대상으로 무료의료봉사도 많이 하시는 훌륭한 분입니다. 그리고 담당의사인 박 과장님도 처음 원장이 오해하여 환자를 내보내라고 했을 때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환자를 내보내려면 자기를 먼저 내보내라고 대들기까지 했습니다.     




원장이 그렇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입단속을 시켰는데도 휘발유 통 사건 등 병원 내부 사정이 밖으로 새어 나간 것은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원장은 자기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원무과장과 미리 입을 맞추어 놓은 모양이었다. 어이없게도 김 과장의 고귀한 슈바이처 정신은 돈벌레 원장의 숭고한 선행봉사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원무과장이 나를 음해하지는 않고 그 정도로 진술한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원무과장의 말을 경찰이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원무과장의 말을 종합하면 경찰은 원장의 지시와는 별개로 내가 환자를 내보낸 것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심장의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소년이 나와 함께 환자를 병원에서 데려갔다고 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설사 소년이 나에게 요청하여 환자를 내보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분명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다. 분명 경찰은 나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끝까지 발뺌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년이 그렇게 자백한다고 해도 나는 끝까지 부인해야 했다. 


사흘 후, 이번에는 원장이 직접 경찰에 불려 갔다.      




― 참고인은 원무과장과 박 과장에게 환자를 내보내라는 지시를 한 적이 있지요?

― 내보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무슨 조치라도 취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 적은 있습니다. 

―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렇게 생떼를 씁니까? 병원비도 내지 않았고, 앞으로 낼 능력도 없고, 보호자도 없고, 다른 환자들이 그 환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집단으로 퇴원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원장이 무슨 조치라도 취하라고 한 것이 환자를 내보내라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 그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지 강제로 퇴원시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참고인은 그 환자를 내보내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한 적이 없지만, 무슨 조치라도 취하라는 말로 간접적인 지시를 한 적은 있지요?

― 예. 그렇게 볼 수는 있겠습니다. 

― 그런 지시를 받은 박 과장이 환자를 내보낸 것이 맞지요?

―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박 과장은 만약 환자를 내보내려거든 자기를 먼저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온순한 사람이 내게 그렇게 대들 줄 몰랐습니다. 그런 박 과장이 환자를 내보냈을 리도 만무합니다. 

― 박 과장의 행위에 참고인은 전연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 지금까지의 진술 외에 참고인은 더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 처음 내가 무슨 조치라도 취하라고 짜증을 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환자를 내보내라는 그런 의미로 얘기한 게 아닙니다. 이런 내 속뜻은 박 과장이나 원무과장이 더 잘 압니다. 나는 그 환자가 토끼섬이라는 작은 섬에서 폭풍우에 고립된 아이 다섯을 구하고 파도에 휩쓸려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병원비 따지지 말고 환자를 내 식구처럼 돌보라고 원무과장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일을 한 의인을 나라에서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환자를 강제로 내보내겠습니까. 환자는 인면수심 그 아들놈이 우리 몰래 제 아비를 병원에서 빼내어 도망친 겁니다. 병원비를 떼먹으려고요. 가만히 있었으면 병원비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인면수심 아들놈이 그만 일을 그르치고 만 것입니다. 

    



정계 진출을 노리고 정가를 기웃거리더니 정치가들이 제일 잘하는 거짓말과 남의 공을 가로채는 못된 버릇부터 배운 모양이었다. 원장은 조사받은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경찰이 생사람을 잡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장 내보내지 않으면 짐을 싸라고 노발대발하던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마치 자기가 환자의 수호천사였던 것처럼 표변하는 원장의 약삭빠른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속이 메스꺼워지려고 했다. 그러나 원장은 이내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 박 과장, 이 일을 어쩌면 좋나? 만약 정말로 박 과장이 환자를 내보냈다면 나까지 처벌받게 된다는데, 병원이 망하게 생겼어.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좀 해보게.


정말로 박 과장이 환자를 내보냈다면? 원장이 다시 염장을 질렀다. 그렇게 내보내라고 달달 볶아 대더니, 정작 내보내고 나니까 이제 그 책임은 모두 내가 지라는 태도였다. 원장도 은근히 내가 환자를 내보낸 것으로 속으로 의심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환자를 빼돌린 일은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원장도 믿을 수 없었고, 원장의 수족인 원무과장이나 이 간호사는 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경찰에 발설하는 날에는 나는 끝장이었다. 먼저 원장을 안심시켜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환자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제는 원장과 원무과장이 미리 짜놓은 각본에 맞춰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경찰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 경찰은 내 혐의를 입증하기 위하여 병원과 내 주변을 온통 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원장이 경찰에 불려 갔다 온 지 2주일 후, 드디어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왔다. 나는 이제까지 조사받은 다른 사람들처럼 참고인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피의자 신분으로 써였다. 그 소환장에 적힌 ‘살인 등 혐의’라는 여섯 글자가 심장을 바짝 얼어붙게 했다. 내 소환장을 본 원장이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 박 과장, 이 일을 어쩌면 좋나? 변호사라도 사야 하지 않겠나? 박 과장이 잘못되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데…….


원장의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만약 자기만 무사할 수 있다면 나는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원장의 이기적인 행동에 화가 치솟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원장의 말대로 변호사라도 선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변호사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틀림없이 변호사는 미리 자백하고 선처를 호소해야 한다고 권유할 것이다. 나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일은 소년과 나만의 비밀 약속이었고, 나는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직 소년을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년이 경찰의 신랄한 추궁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소년이 견디지 못하고 자백해 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것도 그렇지만, 만약 이 일이 스미 아저씨와 소년의 어머니가 계획적으로 꾸민 짓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생쥐 꼴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지갑이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아, 어쩌다가 그 영악한 녀석에게 지갑을 주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쨌든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드디어 소환일이 다가오고, 나는 경찰서로 갔다. 나를 조사할 수사관은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형사였다. 


― 환자가 병원에서 사라진 시간은 몇 시였나요?

― 이 간호사 말로는 오후 2시 30분경쯤이라고 했습니다.

― 피의자는 그때 어디에 있었나요?

― 다음 날 있을 세미나 자료를 가지러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나오면서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 그 자료가 어떤 자료였나요?

― 세미나에서 내가 발표할 자료입니다. 그 자료가 없으면 다른 자료의 정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 피의자는 그런 세미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또 가지러 갔었다는 그 자료를 제출할 수 있나요?

― 지금은 가져오지 않았지만 필요하면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힘주어 말했다. 이런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 둔 말이었다. 조사는 처음에는 내 의도한 대로 되는 것 같았다.


― 그날 집으로 가서 그 자료를 가져왔나요?

― 집으로 가는 도중에 환자가 없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곧바로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 피의자, 자, 이 CCTV 화면을 보면서 얘기합시다.


형사가 티셔츠 소매를 둥둥 걷어 올리면서 말했다. 나는 형사가 가리키는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먼저 소년이 환자가 앉은 휠체어를 밀고 병실을 나와 간호사실 앞을 지나 비상구 계단 출입문 쪽으로 가는 화면이 나타났다. CCTV에 잡히지 않고 병실에서 비상구 계단 출입문까지 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것은 나도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비상구 출입문이 열리고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른 화면이 나타났다. 그 화면은 내 차가 특별병동으로 올라오는 도로 입구에 설치된 방범용 CCTV에 잡힌 화면이었다. 형사가 컴퓨터에서 눈을 떼고 다시 물었다.


― 피의자, 4층 병실에서 나온 그애가 비상구 계단 출입문으로 나가고 난 약 10분쯤 후 피의자의 차가 특별병동 입구 도로에 설치된 방범용 CCTV에 잡혔습니다. 뭔가 짚이는 것이 없습니까?


그곳에 방범용 CCTV가 있는 것은 내가 미리 대비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평소 자주 운전하던 길이었지만, 그곳에 그런 CCTV가 있는 줄은 눈여겨보지 않은 탓이었다. 갑자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잡아떼야 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 방범용 CCTV에 나타난 피의자의 차에 그애와 환자가 타고 있었지 않았냐 하는 말입니다. 

― 그것은 억측입니다. 덮어씌우지 마십시오. 그때 내 차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 4층 비상구 계단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계단으로 오는 시간은 보통 성인 걸음으로는 약 3, 4분 정도 걸립니다. 그것은 내가 직접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피의자와 그애는 환자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끌고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와야 했으니 그보다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요. 약 7, 8분 정도요. 내가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실제로 내려오며 재어 본 시간입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이 방범용 CCTV가 설치된 도로 입구까지는 차로 2분 정도 걸립니다.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소년이 비상구 계단으로 사라지고 약 10분 후에 피의자의 차가 이 방범용 CCTV에 찍힌 것이 우연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입안이 바짝 마르고 정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형사는 그날 내 행동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미 내디딘 걸음이었다.


― 나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 피의자는 평소 출근하면서 일반병동 주차장에 주차하지요?

― 평소에는 그렇습니다. 

― 그런데 그날 특별히 특별병동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둘 필요가 있었습니까?

―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날은 일요일이라 그곳에 주차했을 뿐입니다. 

― 일반병동의 진료실에서 세미나 자료를 준비했다면서요? 

― 그날은 일요일이라 진료가 없어 산책도 할 겸 일부러 그곳에서 걸어서 갔습니다. 평소에도 특별병동 회진을 마치고 걸어서 일반병동으로 갑니다. 

― 피의자가 차창을 갑자기 짙은 색으로 선팅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차에 선팅 한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냥 넘겨짚어 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선팅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다가 들통이 나면 더 큰 의심을 사게 된다.


― 내 차에 선팅 한 것이 그 환자의 실종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 피의자, 그렇게 모른 척 얼버무린다고 속아 넘어갈 줄로 아셨다면 오산입니다. 피의자가 차에 선팅 한 이유를 내가 말해 볼까요? 그 이유는 피의자의 차 안에 탄 환자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이래도 계속 고집을 피우시겠습니까?


이제는 진땀까지 흘렀다. 형사는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와 내가 한 일을 훤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따지고 들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끝까지 가보자.


―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예전부터 선팅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그때 했을 뿐입니다.

― 피의자, 계속 이렇게 나올 겁니까? 이미 그애가 모든 걸 다 실토했습니다.


형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실토했다고? 아닐 것이다. 밀리면 안 된다. 갈 데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넘겨짚는 소리일 것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 그애가 무슨 실토를 했다는 말입니까? 그애가 내 차를 타고 병원을 나갔다고 하던가요? 내가 강제로 퇴원시켰다고 하던가요? 그애를 여기 좀 데려다주십시오. 그애가 뭣 때문에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내가 좀 물어봐야겠습니다.


내가 큰소리로 다그치자 형사는 좀 수그러들었다. 소년이 아직 실토하지 않았구나. 형사가 넘겨짚고 있구나. 아직 희망이 있다. 끝까지 버텨 보자.


― 피의자, 중학 일 학년인 그애 혼자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환자가 탄 휠체어를 끌고 4층 계단을 내려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얘기합시다. 피의자는 평소와는 달리 그 환자가 없어진 날 특별병동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었지요?

― 평소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특병병동에도 자주 주차합니다.      

― 환자가 병원에 없던 시간에 피의자도 병원에 없었지요?

―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군요. 

― 그애가 비상구 계단을 내려간 직후 피의자의 차가 특별병동 입구 도로를 지나갔지요?

― 나로서야 모르는 일이지만, 그 CCTV를 보니 그런 것 같군요.


― 그 환자는 병원비를 내지 않고 있었고, 병원비를 낼 경제적 능력도 없었지요?

― 병원비 문제는 원무과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닙니다.      

― 그것 때문에 원장이 그 환자를 내보내라고 피의자를 다그치고 있었지요?

― 아닙니다. 원장이 직접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 어쨌든 무슨 조치라도 취하라고 지시한 것은 맞지요?

― 예.

― 그 환자 때문에 다른 환자들이 퇴원하겠다고 항의했고, 실제로 퇴원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 퇴원한 이유가 그 때문인진 모르지만, 퇴원한 환자는 있었습니다.


― 그 전날 피의자는 갑자기 자동차 유리창을 짙게 선팅 했지요?

―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습니다.

― 선팅 한 것은 맞지요?

― 예. 

― 피의자는 평소에는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지요?

― 가끔은 합니다. 

― 그날은 특별히 병원에 출근할 이유가 없었지요?

― 세미나 자료 준비 때문에 출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세미나 자료 준비를 하려면 방해받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 발표할 주제에 대한 환자의 진료기록부 등 기록이 병원에 있어서 그것을 참고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다가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아예 준비를 못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그런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집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이 아니라 다른 외부 장소에 있다가도 병원으로 달려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 막무가내로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것이 모두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 어쨌든 난 아닙니다.


― 내 참, 더 이상 실랑이하지 맙시다. 아실 만한 분이니까. 끝까지 고집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나도 피곤합니다. 

― 나는 아닙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자칫 잘못되어 내 의사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이 끝장나는데, 당신이라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 정말 이러시면 바로 구속영장이 청구될 수도 있습니다. 그냥 겁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 칼자루를 쥔 쪽은 그쪽이니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무슨 증거로요? 법치주의 국가에서 아무 증거도 없이 어떻게 사람을 구속하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내가 강하게 부인하자, 형사는 목소리를 낮추어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


― 환자를 내보낸 정황에 대해서는 그렇고, 그 환자에 관하여 물어보겠습니다. 피의자가 병원에서 환자를 내보낼 당시 그 환자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그러나 그 말에는 내가 환자를 강제로 퇴원시킨 것처럼 단정하는 낚시 미끼가 달려 있었다. 이런 낚시질 유도 신문에 걸려들면 안 된다.


― 내가 내보내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허허, 알겠습니다.


낚시 미끼에도 걸려들지 않자 형사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 그럼 실종되기 직전, 그 환자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 환자의 상태라니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 나는 지금 담당의사에게 실종되기 직전 환자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담당의사가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까? 아예 모른다는 소리가 입에 붙었군요.


형사가 소리를 질렀다.


― 뭐라고요? 이렇게 인격을 모독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조사받지 않겠습니다. 지금 당신이 한 그 말도 조서에 분명히 기재하십시오. 나도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형사는 수그러졌다.


― 그럼 이렇게 쉽게 묻겠습니다. 실종되기 전, 그 환자는 살아 있었지요? 담당의사가 환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이 말은 나를 대놓고 비웃는 말이었다. 속에서 불길이 솟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살아 있었습니다.


나도 조금은 비꼬는 표정으로 씁쓸하게 말했다.


― 그 환자는 치료를 중단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그런 환자였지요?

― 예, 치료를 중단하면 생명이 위태로웠고, 치료를…….

― 아, 됐습니다. 치료를 중단하면 곧바로 생명이 위태롭다. 분명 그런 말이지요?

― 예. 그러나 치료를 계속…….

― 됐습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나는 치료를 계속한다고 해도 상태가 호전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형사가 내 말을 여지없이 자르고 말았다. 형사가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 그 환자에게는 보호자가 없었지요?

― 예, 없었습니다.


형사와 나의 실랑이는 무려 15시간 이상이나 계속됐다. 형사가 신랄하게 추궁하다가 호통을 치면 내가 대들기도 하고, 식은땀을 몇 번이나 흘렸는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내심 난처하게 여기고 있던 점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내가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것은 소년과 아버지를 태운 내 차가 병원을 빠져나와 해안 마을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에 행여 도로에 설치되어 있을 방범용 CCTV에 포착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창성시 시내에 있는 내 아파트와 그 해안 마을 선착장은 방향이 달랐다. 그런데 자료를 가지러 집으로 갔다는 내 차가 선착장으로 가는 방향의 도로에서 포착되었다면, 이제까지의 내 진술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부분을 추궁한다면, 나는 집으로 가기 전에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바닷가로 나가 바람이라도 좀 쐬고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고 얼버무릴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변명이 아주 궁색하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선착장까지의 도로에 방범용 CCTV가 없었는지, 아니면 형사가 이 부분은 미처 간과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부분을 추궁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겨우 조사를 마치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조사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 형사와 수사과장이 안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과장님, 의사 새끼들 다 저렇습니까? 뻔히 알 만한 새끼가 말입니다. 그 악질 애새끼보다 더하네요. 

― 제 모가지가 떨어질 판인데, 끝까지 버티는 거겠지. 여기서 그냥 마무리하고 내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해. 오늘 지갑을 히든카드로 남겨둔 것은 잘한 일이야. 검찰에서 제 지갑을 들이대면 술술 불 거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파김치가 된 몸이 스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경찰서 복도의 형광등이 무당의 춤사위처럼 펄쩍펄쩍 흔들렸다. 갑자기 불빛이 노랗게 보이더니 일순 주위가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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