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피터 팬, 후크 선장을 목선에 태워 보내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그날부터 나는 소년과 함께 환자를 탈출시킬 계획에 착수했다. 우리는 먼저 디데이 날을 10일 후인 일요일로 잡았다. 이 작전에 소년과 나 이외에는 누구도 개입되어서는 안 되었다. 나 이외에 병원 관계자 그 누구도 몰라야 하고, 소년 이외에 여선생이나 아이들도 절대로 모르게 진행해야 하는 비밀 작전이었다.
먼저 디데이 날로 잡은 10일 후, 일요일에는 아이들이 병원으로 오지 않아야 했다. 아이들이 있는 상태에서 환자를 병원에서 빼돌릴 수는 없었다. 여선생도 오지 않아야 했다. 나는 이것이 걱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엉엉 울면서 환자를 내보내지나 않을까 걱정하던 그녀였다. 그녀가 알면 이 작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3일 후 토요일, 내 전화를 받고 걱정이 되었던지 여선생이 아이들을 인솔하여 병원으로 왔다. 예전보다 더더욱 볼살이 빠져 이젠 정말 살아 있는 해골처럼 변해 버린 후크 선장을 본 그녀는 울음부터 먼저 터트렸다. 그녀가 울자, 아이들로 덩달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병실은 일순간에 울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 선생님, 아버님을 내보내지 않을 거죠?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나는 이때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속여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환자를 탈출시키려는 우리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그야말로 펄쩍 뛸 일이었다.
― 자, 진정하고 진료실로 가서 얘기해요.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일반병동의 진료실로 내려왔다. 그것은 그녀가 없는 동안에 소년이 아이들에게 지시할 수 있도록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사실, 며칠 전에 위험한 고비를 한 번 넘겼습니다. 이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 그래도 내보내지는 않으실 거죠? 선생님, 약속해 주세요.
― 그럼요. 내보내지 않습니다. 제가 약속했잖아요.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 그 약속 꼭 지키실 거죠? 그렇죠? 선생님.
― 예, 지킬 겁니다. 꼭 지키겠어요.
나는 의식적으로 큰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쓰렸다.
― 선생님, 고맙습니다.
또다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럴수록 내 가슴은 더욱 미어지고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난 그녀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선생님, 언젠가 제게 물으셨죠?
― ……?
― 무엇 때문에 혼자 외딴 섬마을에 와서 고생하냐고요?
―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나는 알면서도 일부러 반문하며 얼버무렸다.
― 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거든요. 전 배우러 왔거든요. 바다와 섬과 아이들에게서……. 꿈과 순수를요. 그런데 어른들은 너무 잔인해요. 어떻게 피터 팬에게, 후크 선장에게 그럴 수 있죠?
그 말은 분명 소년의 어머니와 스미 아저씨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내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와 아이들이 돌아간 후, 내가 병실에 가자 소년이 말했다.
― 선생님, 아이들은 다음 주엔 오지 않을 거예요.
― 정말이지?
― 예, 제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제 말은 들어요. 제가 대장 피터 팬이거든요. 선생님에게도 오시지 말라고 했어요.
― 장담할 수 있지?
― 예, 틀림없어요.
다음 주 월요일 저녁, 나는 서울에서 개최되는 의학 세미나에 참석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세미나를 이용하고자 했다. 나는 월요일 세미나에서 발표할 자료를 병원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요일에는 내가 당직을 서겠다고 간호사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그리고 나는 특별병동 지하주차장의 어느 곳이 CCTV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지 사각지대를 미리 확인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CCTV에 소년과 함께 환자를 이송하는 내 모습이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애초에는 지하주차장의 CCTV 전원을 차단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유독 환자가 없어진 그때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면 훨씬 더 계획적 범행으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해안 마을까지 걸리는 시간도 미리 점검해 보았다. 전에 난을 가져오던 날 원무과장의 차를 타고 선착장까지 가봤지만, 다시 한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승용차로 속력을 내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탈출하여 토끼섬으로 가는 해안 마을 선착장까지 소년과 환자를 실어다 주면 내 역할은 끝났다.
일요일, 드디어 나는 소년과 함께 작전을 개시했다. 오후 2시, 일반병동에 있던 나는 특별병동 4층 간호사실로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실에는 일요일 당직 근무자로 이 간호사 혼자 나와 있었다.
― 이 간호사, 지금 일반병동 응급실로 좀 내려오세요.
― 무슨 일이 있어요? 선생님.
― 아니, 무슨 일은 아니고 내일 세미나 자료 준비로 급히 어디 좀 다녀올 일이 생겨서,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잠시 응급실을 좀 지켜줘요.
― 이곳은 어떻게 하고요?
― 잠시 자리 비우는데, 별일이야 생기겠어. 잠시만 내려오세요.
― 알겠습니다, 선생님.
10여 분 후 이 간호사가 응급실로 내려왔다. 나는 이 간호사에게 한 시간쯤 걸릴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휴대전화로 연락하라고 지시하고는, 급히 특별병동으로 올라가 건물 뒤편 1층 외부 비상구 계단을 통하여 4층으로 올라갔다. 그 비상구 계단은 CCTV에 잡힐 염려가 없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소년은 4층 비상구 계단 입구에서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이 간호사를 불러낸 것은 소년이 아무도 모르게 간호사실 앞을 지나 이 비상구 계단까지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비상구 계단을 택한 것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병원 건물을 탈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들이나 병원 관계자는 물론 다른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감쪽같이 병원을 빠져나와야 했다. 엘리베이터나 일반 출입문을 이용하면 그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고, 병원 내에 설치되어 있는 CCTV에 포착될 것이었다.
그러나 비상구 계단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또 이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더구나 당직 근무자만 출근한 일요일에 이 비상구를 이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소년 혼자 환자가 앉아 있는 무거운 휠체어를 끌고 계단을 내려오기는 불가능했다. 내가 도와주어야만 했다.
소년과 나는 조심스럽게 환자가 앉은 휠체어를 아래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계단에서 덜컹거리지 않도록 휠체어를 마주 보고 들다시피 낑낑거리며 지하 1층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그리고는 주차장 오른쪽 구석진 벽에 바짝 붙다시피 우회하여 아침에 출근하면서 내가 미리 세워 둔 내 승용차로 갔다. 그렇게 벽을 따라 우회해야 주차장의 CCTV에 포착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승용차가 주차해 있는 지점도 물론 CCTV가 포착할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며칠 전에 나는 내 차의 유리창을 외부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짙게 선팅 했다. 선팅을 한 것은 혹시라도 일반도로에서라도 차에 타고 있는 소년과 환자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나는 소년과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급히 병원을 벗어났다. 간호사에게도 들키지 않고 CCTV 카메라에 포착되지도 않고 병원을 탈출하려던 우리의 작전은 이렇게 성공했다.
이 간호사에게 한 시간쯤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 것은 선착장까지 소년을 데려다주고 돌아올 수 있는 시간까지 감안한 것이었다. 병원을 빠져나와 선착장으로 급하게 운전하고 있는데,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병원을 빠져나온 지 20분쯤 지난 뒤였다. 폴더를 열자마자 숨넘어가는 이 간호사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 선생님, 큰일 났어요.
―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나는 일부러 약간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뭐 그리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는 투였다.
― 환자가 없어졌어요.
― 환자가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VIP실에 있던 그애와 환자가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그때야 나는 놀라는 척 일부러 크게 말했다.
― 이 간호사는 일반병동 응급실에 있지 않았어요?
― 환자의 혈압과 심박수 체크를 위해 다시 병실에 왔는데 환자가 없어요. 이걸 어쩌면 좋죠?
― 당황하지 말고, 혹시 어디 복도나 화장실 같은 데 있나 찾아봐요. 내 지금 곧바로 병원으로 갈게.
― 예, 알았습니다.
나는 더욱 급하게 차를 선착장으로 몰았다. 급히 돌아가지 않으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약 5분 정도를 더 달리니 멀지 않은 곳에 선착장이 보였다. 그때 소년이 말했다.
― 선생님, 여기에서 세워 주세요.
― 선착장은 저기 저곳이 아니니?
― 바퀴의자를 끌고 여기서 걸어갈게요. 혹시 선착장에 있는 사람들이 선생님의 차를 보면 안 되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들키지 않고 병원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는데, 선착장에서 휠체어에 태워진 해골 같은 환자의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필시 그 사람들이 내 차나 얼굴을 기억할 것이었다. 차의 속도를 줄이고 운전하면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국도에서 갈라져 높은 둔덕 뒤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농로가 보였다.
나는 핸들을 꺾어 그 농로로 진입하여 둔덕을 넘었다. 그곳은 높은 둔덕에 가려져 국도를 오가는 차들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이미 11월 하순으로 접어든 둔덕 뒤 들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둔덕 뒤 농로에 차를 세우고 먼저 휠체어를 내리고, 다음으로 소년과 함께 환자를 내려 휠체어에 앉혔다. 다행히 맑은 가을 햇살이 퍼지고 있는 들판은 바람도 불지 않고 따뜻했다.
― 선생님, 고맙습니다. 전 이곳에 잠시 숨어 있다가 선생님이 간 후에 나갈게요.
― 그래라, 그것이 좋겠다. 내일 내가 주사약과 링거액을 가지고 섬으로 가겠다. 내일 아침까지는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조치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오늘 저녁 약은 시간에 맞춰 꼭 드시도록 해야 한다. 알았지?
― 예.
나는 내일 월요일, 서울에서 있을 세미나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대신 환자에게 필요한 약과 링거액 등을 준비하여 소년의 섬마을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일부러 세미나가 있는 날을 택한 이유였다. 나는 서둘러 다시 차에 올랐다.
― 선생님, 잠깐만요.
막 시동을 걸어 출발하려는데 소년이 뭔가 잊어버린 것을 새삼 생각한 듯 말했다.
― 무슨 일인데?
― 선생님 지갑 제게 주세요.
― 왜, 돈이 필요해서 그러니?
― 아뇨, 돈은 있어요.
그러면서 어디에서 났는지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꼭꼭 접힌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보였다.
― 그런데 왜?
― 꼭 필요할 것 같아서요. 나중에 반드시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약속해요.
― 알았다. 그렇게 하렴.
나는 소년의 의중을 모른 채 신분증과 신용카드 등을 꺼내고 약간의 현금만 들어 있는 지갑을 소년에게 주었다.
― 아뇨, 신분증이랑 카드가 있는 그대로요.
― 뭐라고?
― 있는 그대로의 지갑이 필요해요.
소년이 차 앞을 막아서고는 지갑을 주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듯이 말했다. 시계를 보니 병원을 나온 후 이미 40분이 지나 있었다. 한시바삐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 마음은 조급해졌다.
― 모두 다 선생님을 위해서예요. 지갑은 그대로 선생님께 돌려드릴게요. 약속해요.
이제는 더욱 다급해졌다. 왜 내 지갑이 필요한지, 그 이유와 소년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 다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 분명 나쁜 의도는 아닌 거라고 좋게 생각했다. 소년에게도 돈은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할 수 없이 지갑을 통째로 소년에게 주고는 급히 차를 돌려 나왔다. 국도에서 소년이 숨어 있는 둔덕 쪽을 바라보니, 소년은 보이지 않고 높다란 둔덕 위에 철 지난 노란 들국화가 초겨울 새파란 바람을 맞으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 도대체 뭘 하고 있었어요? 환자가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뜸 이 간호사에게 큰소리부터 질렀다.
― 선생님이 부르셔서 일반병동으로 간 사이에 도망갔나 봐요. 선생님, 이를 어떡해요?
이 간호사가 덜덜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 그걸 내게 물으면 어떡해.
나는 일부러 계속 화난 듯이 말했다. 이 간호사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나는 연극을 해야 했다.
― 선생님,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 큰일 날 소리. 찾는 데까지 찾아보고 원장님께 보고부터 해야지. 우리끼리 어쩌자고. 그리고 제 발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그놈이 다 죽어 가는 환자를 데리고 가봐야 어디로 가겠어.
나는 이 간호사에게 다시 한번 버럭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선착장에 도착하여 여객선을 타고 섬에 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후 4시에 선착장에서 섬으로 가는 마지막 여객선이 있었다. 둔덕을 돌아 나올 때가 2시 40분경이었으니까, 소년이 아버지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가는 도보 걸음이라도, 그곳에서 선착장까지는 넉넉잡고 1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년은 4시에 떠나는 여객선을 타고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시간을 벌어 두어야 했다. 경찰에 신고하자는 이 간호사의 말을 일부러 핀잔까지 주면서 일축한 이유였다.
― 이 자식이 끝까지 말썽을 부리네.
나는 이 간호사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투덜거렸다.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병원 1층부터 4층까지 한 곳도 빠짐없이 샅샅이 찾아보라고 이 간호사에게 지시하고는, 나는 옥상정원이며 산책로 등 병원 바깥을 수색해 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부러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찾는척하면서, 또 혹시 제 발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면서 3시간 가까이나 미적미적 시간을 죽이다가,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원장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그러고는 원장의 지시에 마지못해 경찰서에 환자의 거짓 실종신고를 했다. 물론 이런 연극을 한 것도 소년에게 섬으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벌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소년이 타고 갔을 4시의 그 여객선이 그날 토끼섬으로 가는 마지막 배편이었다. 아마도 경찰이 섬에서 소년을 찾아내려면 빨라도 내일 첫 번째 여객선 시간이 지난 오전 10시쯤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나름대로 짐작했다.
나는 퇴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년과 환자가 머무르던 VIP실로 가보았다. 소년과 후크 선장의 체취가 그대로 병실에 머물고 있었다. 혹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직 치우지 않고 있는 병실 침대를 바라보면서 나는 여전히 그곳에 후크 선장이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러나 소년과 후크 선장은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벽에 붙은 붙박이 수납장을 열어 보았다. 아래위 두 칸으로 된 수납장 위 칸에는 꽤 큼직한 배낭 하나와 그 옆에 후크 선장의 비망록 노트가 있었다. 집에서 가져왔던 의복이나 세면도구 등 잡다한 사물은 배낭 속에 넣어 두고 비망록만 별도로 챙겨놓은 것 같았다.
아래 칸에는 내가 민속주점에서 빌려다 주었던 괘종시계가 모두 들어 있었다. 그 시계는 나중에 내가 별도로 챙겨 그 민속주점에 반환해야 할 물건이었다. 배낭은 꽤 무거웠다. 중학 1학년 어린 소년이 무거운 배낭까지 지고 환자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가기에는 힘에 부칠 것 같았다. 나중에 가져갈 생각으로 그곳에 그대로 남겨 두고 간 것 같았다.
아버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그 비망록일 터였다. 그 비망록만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소년에게 직접 전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망록을 들고 병실을 나와 퇴근했다.
다음 날 월요일 아침 병원에 출근하자마자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약과 주사기, 링거액이 든 가방을 챙겨 섬으로 갈 준비를 했다. 원장이 진료실까지 내려와 고함을 질렀다.
― 환자가 없어진 마당에 지금 어디 가려는 거요?
― 어젯밤에 곰곰 생각해 보니 환자가 갈 곳은 그 섬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가보려고…….
― 제 발로 사라졌다니 고맙기는 하다만, 혹시 경찰에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밤새 경찰이 환자를 찾아냈을 수도 있지 않겠소.
원장과의 한바탕 소동 때문에 아침 일찍 토끼섬으로 가려던 내 계획은 차질을 빚고 말았다. 나는 초조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어느덧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소년의 집에 도착하여 환자에게 새로운 링거 주사를 놓아주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방을 들고 진료실을 나왔다. 낚싯배라도 대절해서 섬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료실을 나와 병원 출입문으로 향하면서 출입문 옆 안내실 데스크에 막 배달된 석간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아무도 펼치지 않은 채 신문의 1면 상단이 그대로 눈에 띄었다.
1면 상단을 대문짝처럼 크게 장식한 제목이었다. 혹시? 소년과 아버지 후크 선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문을 집어 들고 소제목을 읽었다.
어젯밤에 토끼섬에서 일어난 소년과 그 아버지 후크 선장의 기사였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너무 당황하여 한순간 머리가 몽롱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사는 커다란 제목에 비해 알맹이는 없었다.
경찰의 보도 자료만을 짧게 인용한 것이고, 사건의 자세한 경위나 내막은 아직 실려 있지 않았다. 새벽에 조업을 나가던 인근 어선이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작은 목선에서 죽어 있는 환자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 그날 새벽이었고, 신문발행 시간까지 경찰의 보도 자료 외에 사건 경위를 취재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안내실 데스크에 신문을 그대로 올려놓고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다. 덜컥 소년에게 지갑을 줘버린 일이 생각났다. 갑자기 눈앞이 노래지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걸 어쩌나? 그 영악한 녀석에게 속고 말았다. 어쩌면 녀석의 어머니와 스미 아저씨라는 사람이 획책한 다른 음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그들이 계획한 음모일 가능성이 더 크다. 재산을 모두 빼돌려 놓고 법적으로 이혼까지 한 여자였다. 그 여자 뒤에 있는 남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법원 실무 전문가라고 했다. 그들이 작당하여 처음부터 병원을 상대로 뭔가 음모를 꾸몄을 것이다. 그들이 이를 빌미로 어떤 협박을 해올지…….
이것도 문제지만, 그 녀석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하는데, 내게도 불똥이 튀는 것은 아닐까? 나도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 지갑을 가져간 녀석이 나를 끌고 들어가면, 나는 속절없이 그 녀석과 공범이 되어 버릴 것이다. 아아,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다시 한번 덜컥 심장이 내려앉으며 온몸에서 힘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땅을 치며 후회한들 이미 늦은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