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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도 Jun 09. 2023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제28화 피터 팬, 스미 갑판장을 쓰러뜨리다

임재도 작가의 법률감성소설

피터 팬, 법정에 서다

존엄사법이 제정되지 않아 살인범이 된 어느 소년의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간병과 사랑이야기 






― 이제 불을 피우자.


소년이 말했다. 아이들이 모두 참호 앞 모래사장에 미리 쌓아 둔 나뭇더미 쪽으로 갔다. 슬리가 집에서 가지고 온 일회용 라이터로 나뭇더미 아래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고고한 달빛 아래서 모래사장에 불길이 타올랐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돌면서 춤을 추었다. 나나도 덩달아 깡충깡충 뛰며 돌았다. 아이들은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거의 사그라들 때까지 춤을 추고 놀았다. 


― 이제 네버랜드로 가서 기다리자.


소년이 말했다. 아이들은 다시 참호로 들어갔다. 참호 앞 모래사장에는 이제 사그라진 불길이 잉걸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잔잔하던 바다가 일렁거렸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에 잉걸불로 타오르던 불길이 작은 불꽃별이 되어 하늘로 흩어져 날렸다. 


 봐.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 이제 곧 후크 선장이 돌아올 거야.


소년이 말했다. 아이들은 잉걸불에서 하늘로 날려 흩어지는 불꽃별 사이로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다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빛으로 말갛게 빛나던 하늘은 어느새 짙은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며 모래바람이 날렸다. 이따금 빗방울이 우두둑 모래사장을 두드리기도 했다. 빗방울을 맞은 잉걸불에서 푸시시 하얀 수증기 입김이 피어올랐다. 바람과 비를 품은 날씨가 꽁꽁 얼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 후크 선장은 왜 안 와? 


한층 더 사그라져버린 불꽃을 바라보며 마이클이 입에서 하얀 입김을 토해 내며 물었다. 


― 곧 올 거야.


소년이 말했다.


― 추워.


존이 말했다.


―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후크 선장이 온다고 했으니까.


투틀즈가 말했다. 


― 후크 선장은 약속을 지켰어. 후크 선장을 기다려야 해.


웬디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아이들은 추위에 떨며 참호 속에서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며 후크 선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따금 우두둑 뿌리던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참호 위를 얽은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이파리 몇 개가 차가운 겨울바람에 떠는 문풍지처럼 파르르 떨다가 횅하고 날려갔다. 어린 마이클은 추위에 떨다 웬디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추운 날씨에 아이 중 누군가가 이제 집으로 가자고 할 만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무슨 마법에 걸려버린 것처럼 그대로 참호 속에 웅크려 있었다. 또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투틀즈와 슬리가 서로 껴안고 추위에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아더더 어깨를 떨었다. 이제 마이클과 존을 함께 품에 안은 웬디도 심하게 떨며 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 누구도 집에 가자고 하지 않았다. 후크 선장이 무슨 마법을 사용하여 아이들의 입을 봉해 버리고, 발을 아예 참호 속에 붙들어 매어버린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그대로 참호 속에 웅크려 있었다.


이제 소년도 자꾸만 눈이 감겼다. 추웠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빨이 저절로 딱딱 마주치고 턱까지 얼어붙고 있었다. 어쩌면 후크 선장은 우리가 추위에 떨다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후크 선장은 그때를 노려 네버랜드를 기습 공격해 올 것이다. 소년은 추위에 떨며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배를 띄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후크 선장은 바람이 잦아드는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벽, 아침 해가 솟는 그때를 기다려 네버랜드를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지켜야 한다. 끝까지 지켜야 한다. 후크 선장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네버랜드를 함락시킬 것이라고 했다. 단단히 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잠들면 안 돼. 후크 선장은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비겁하게 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기습 공격하려고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소년의 생각과는 달리 소년의 의식은 점차 흐려져 갔다. 소년은 억지로 눈을 비비며 잠을 쫓아냈다. 그러나 소년의 의지와는 다르게 눈은 계속 감기고 있었다. 


또다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소년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년의 눈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저 멀리 어두운 바다에서 소리도 없이 무엇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어두운 바다 저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 저게 무엇인가? 그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범선이었다. 그 배는 아버지 후크 선장이 타고 나간 작은 목선이 아니었다. 통통통 검은 연기를 뿜어내던 아버지의 발동선도 아니었다. 그때까지도 소년의 뇌리에 뚜렷이 남아 있는 피터 팬 동화책의 삽화처럼 돛이 주렁주렁 매달린 엄청난 크기의 육중한 범선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범선 한 척이 검은 바다 위에서 소리도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일 높은 돛대 끝에 내걸린 펄럭이는 검은 해적 깃발, 하얀 해골에 뼈다귀로 ×자가 그려진 검은 해적 깃발을 매단 진짜 해적선이 천천히 다가오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 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일 높은 돛대 위 가로대에 매달리다시피 한 사람은 분명 이탈리아인 쎄코, 갑판 중간 돛대 기둥 아래서 술통을 끌어안고 있는 저 사람은 빌 주크스, 그래, 양복 윗도리를 입고 어깨를 으쓱대며 갑판을 돌아다니고 있는 저 사람은 스타키가 틀림없어. 그들 외에도 갑판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졸개 해적들은 더 많았다. 아마 수십 명은 넘을 것 같았다.


후크 선장, 드디어 나타났구나.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순간 소년은 진짜 피터 팬이 되어 있었다. 피터 팬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그 칼은 이제까지 해적놀이를 하면서 사용하던 가짜 나무칼이 아니었다. 예리하게 벼른 진짜 쇠칼이었다. 그때 뱃머리 갑판 위에 후크 선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안감을 댄 검은 망토와 삼각 해적모자에 말꼬리 수염을 위쪽으로 꼬아 올린 차림새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악어에게 물려 잘려 나간 후크 선장의 오른팔이 멀쩡했다. 갈고리 한 개가 달려 있어야 할 오른팔에 손가락 다섯 개가 달린 멀쩡한 손이 붙어 있었다. 더군다나 후크 선장은 그 오른손으로 칼을 빼 들고 여기저기 가리키고 소리 지르며 해적들에게 뭔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후크 선장의 명을 받은 해적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일하고 있었다. 


돛대 위 가로대 위에 올라가 있던 쎄코가 펼쳐진 돛을 말아 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해적들도 일제히 펼쳐진 돛을 말아 올렸다. 해적선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이윽고 바다 위에 정박했다. 해변에서 꽤 멀어 보였다. 아마도 배가 너무 커서 물이 얕은 해안까지는 접근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돛을 완전히 걷어 올린 해적들이 이제는 오른쪽 선측 외판에 매달려 있던 구명용 보트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보트도 아버지의 목선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이윽고 보트가 바다 수면에 내려지고, 해적들이 줄사다리 끝을 그 보트 위에 내렸다.


먼저 이탈리아인 쎄코와 빌 주크스가 앞뒤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트에 탔다. 쎄코와 빌 주크스가 사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아래서 단단히 잡고, 이어 후크 선장이 졸개 해적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받으며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 뒤를 이어 졸개 해적 셋이 다시 내려왔다.


후크 선장이 보트 가운데에 서고, 쎄코와 빌 주크스 그리고 졸개 해적들이 앞뒤에 나란히 앉아 노를 젓기 시작했다. 후크 선장과 해적단이 보트를 타고 네버랜드 해안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후크 선장이 탄 보트 뒤에도 해적들이 여러 척의 보트에 나눠 타고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오냐, 오너라, 후크 선장. 피터 팬은 다시 한번 칼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드디어 후크 선장이 탄 보트가 물가에 닿았다. 이탈리아인 쎄코가 보트에서 뛰어내려 물속에서 무릎과 두 손을 짚고 엎드렸다. 빌 주크스도 첨벙첨벙 앞으로 뛰어가 쎄코 앞에 엎드렸다. 다른 졸개 해적이 빌 주크스 앞에, 또 다른 졸개 해적이 그 졸개 해적 앞에 엎드렸다. 후크 선장이 물속에 네 발로 엎드린 졸개 해적들의 등허리를 징검다리 삼아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드디어 모래사장에 발을 올려놓았다.


멀리 보트 위에 서 있을 때는 몰랐지만, 모래사장 위에 올라선 후크 선장의 덩치는 엄청나게 컸다. 소년이 턱을 들고 치켜보아야 할 정도로 큰 키에 표정도 험상궂었다. 그 모습을 본 피터 팬은 저절로 움츠러들고 말았다. 시계소리에 놀라 도망치던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런데 피터 팬은 그런 후크 선장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험상궂은 표정과 감아올린 꼬리 수염이 아니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분명 어딘가에서 본 얼굴이었다. 후크 선장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고 피터 팬이 숨어 있는 참호를 향하여 칼끝을 겨누며 소리쳤다.


 꼬마 피터 팬. 네 녀석이 거기 숨어 있는 줄 다 안다. 어서 나와 항복해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어두운 밤바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천둥 같은 소리였다.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리에 겁을 집어먹을 피터 팬이 아니었다. 피터 팬은 항상 이겼다. 나는 이긴다. 피터 팬은 속으로 다짐하고 칼 쥔 손에 힘을 주며 참호에서 뛰쳐나와 소리쳤다.


― 오냐. 후크 선장. 여기 피터 팬이 나왔다.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자. 

― 하하하, 꼬마 녀석이 겁도 없구나. 그런데 꼬마야. 내가 어디 후크 선장처럼 보이냐?


후크 선장이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 뭐라고? 그럼 너는 누구냐? 왜 후크 선장의 흉내를 내느냐?

― 하하하, 잘 봐라, 내가 누군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너는 기절초풍하겠지. 하하하.


피터 팬은 후크 선장의 차림새를 한 거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 그런데 이자가 누구인가? 피터 팬은 깜짝 놀랐다. 후크 선장처럼 검은 삼각모자를 쓰고 수염을 말아 올린 거인은 바로 스미 갑판장이었다. 후크 선장의 검은 망토 안에 악어가죽으로 만든 단단한 갑옷을 받쳐 입고 있었다.


― 아니, 너는 스미 갑판장!

― 하하하, 꼬마야. 이제야 날 알아보겠느냐?

― 후크 선장은 어디 있느냐? 네가 왜 후크 선장의 흉내를 내느냐?

― 하하하, 그 바보 같은 후크는 내가 이미 지옥에 보내 버렸다. 내가 단칼로 후크를 처치해 버렸단 말이야.

― 뭐라고? 거짓말하지 마라. 후크 선장은 너에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 이 바보 같은 꼬마야. 그럼 저 돛대 꼭대기를 봐라. 내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스미 갑판장이 몸을 돌려 칼끝으로 바다 위 범선을 가리켰다. 피터 팬이 돛대를 바라보았다. 돛대 꼭대기에 누군가가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풀어져 바람에 휘날렸다. 피터 팬은 눈을 깜박이며 그 사람이 누군지 살펴보았다. 아,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스미 갑판장과 함께 갔던 엄마가 해적선의 돛대 꼭대기에 묶여 있었다.


― 엄마, 엄마잖아? 엄마가 왜 저기에 묶여 있어?

― 하하하, 이 바보 같은 꼬마야. 이제 알겠느냐? 내가 후크를 처치하고 네 엄마를 노예로 삼았단 말이야. 이제 알겠느냐?

― 이 나쁜 놈. 살려 주지 않겠다.

― 하하하, 이 꼬마야. 너 같은 꼬마가 무슨 재주로 날 이길래? 네가 피터 팬 동화처럼 정말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아? 이 바보 녀석아. 세상에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것은 환상일 뿐이야. 팅크 벨의 금가루,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야. 이 세상에 요정이 어디 있어?

― 날 수 없어도 너를 이길 수 있어. 피터 팬은 항상 이겼어.


피터 팬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 하하하, 꼬마야. 피터 팬이 항상 이긴다고? 어리석은 녀석! 그것은 어른들의 거짓말일 뿐이야. 순진한 녀석, 그것을 믿다니.

― 여러 말할 것 없다. 어서 이 피터의 칼이나 받아라.


피터 팬이 칼을 빼 들고 스미 갑판장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피터 팬은 스미 갑판장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내지르는 발길질에 모래사장에 얼굴을 박으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놓쳐 버린 칼은 이미 저만치 멀리 날아가 모래사장에 뒹굴었다.


― 꼬마야. 이래도 덤빌 테냐? 이제 시계소리를 내보렴. 내가 도망갈 것 같아? 시계를 삼킨 악어? 하하하, 꼬마야. 그 악어는 이미 내가 잡아 죽였어. 그놈 가죽을 벗겨 내 갑옷을 만들었단 말이야. 이 갑옷이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스미 갑판장이 안에 받쳐 입은 악어 갑옷이 드러나도록 검은 망토의 끈을 풀어 제치며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타이르듯 다시 말했다.


― 자, 꼬마야, 보았느냐? 이제 그만 항복해라. 좋은 말로 이를 때 그만 항복하고 나와 함께 해적선으로 가서 내 노예가 되어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 차라리 죽여라. 죽어도 항복하지 않겠다.


피터 팬은 눈을 치켜뜨고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 오냐, 그러면 할 수 없다. 이 스미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해. 너를 죽이기 전에 먼저 네 엄마부터 죽여 주마. 

― 뭐라고? 엄마를 죽이겠다고?

― 그래, 엄마를 살리려거든 그만 항복해라. 이 스미의 마지막 경고다. 


피터 팬은 망설였다. 항복하고 노예가 되어 엄마를 살릴 것인가, 이대로 죽을 것인가? 그때 후크 선장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모래사장에 울려 퍼졌다.


(― 아들아, 싸워라.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어라.)


피터 팬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피터 팬은 엉금엉금 기어가서 모래사장에 떨어져 있는 칼을 집어 들었다.


― 싸우다 죽겠다. 덤벼라.


그리고는 허리를 반쯤 구부린 자세로 웅크리고 서서 스미 갑판장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 하하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 같으니. 오냐, 정 그렇게 원한다면 죽여 주마. 어서 덤벼 보아라. 


스미 갑판장이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악어가죽 갑옷을 입은 배를 퉁퉁 두드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피터 팬이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스미 갑판장은 칼을 막거나 피하지 않았다. 피터 팬이 휘두른 칼은 오히려 악어가죽 갑옷 위에서 퉁퉁 튕겨 날 뿐이었다.


― 하하하.


스미 갑판장의 비웃는 웃음소리가 모래사장에 가득 퍼졌다. 


― 이놈아, 얼마든지 휘둘러 봐라. 어디 내 손끝 하나 다치나. 자, 자, 여기도, 여기도, 옳지, 그래, 그래, 잘한다. 


피터 팬은 안간힘을 다해 이리저리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스미 갑판장의 악어가죽 갑옷은 너무도 단단했다. 피터 팬의 힘으로 그 갑옷을 뚫기란 역부족이었다.


― 에라, 이놈아.


스미 갑판장이 귀찮다는 듯 다시 한번 발길질로 피터 팬을 냅다 내질렀다. 피터 팬은 또다시 저만큼 쿵 하고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칼을 놓치지 않았다. 스미 갑판장이 성큼성큼 다시 다가와 말했다.


― 이래도 계속 까불 테냐?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 경고다. 

― 차라리 죽여라.

― 좋다. 이 스미는 그렇게 인내심이 없어. 꼭 그렇게 원한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얘들아, 신호를 보내라.


스미 갑판장이 뒤에 선 쎄코와 빌 주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스미 갑판장의 왼쪽 가슴 날개 갑옷 단추가 열렸다.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피터 팬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쎄코와 빌 주크스가 바다에 정박해 있는 해적선을 향하여 손을 흔들며 뭔가 신호를 보냈다.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졸개 해적 하나가 그 신호를 보고 어머니가 매달려 있는 밧줄을 칼로 내리쳤다. 엄마의 몸이 바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안 돼. 엄마, 엄마! 안 돼. 


순간 피터 팬이 외치며 스미 갑판장에게 달려들었다. 단단하게 부여잡은 피터 팬의 칼끝이 스미 갑판장의 열려 있는 가슴 날개 갑옷 틈새를 파고들었다. 스미 갑판장이 칼을 떨어뜨리고는 가슴을 부여안고 털썩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 아이고, 이를 우짜노. 야들이 꽁꽁 얼어 삐릿네. 


누군가가 소리쳤다. 또복이 할매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소년은 그때까지도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있었다. 엷은 햇살이 얼굴에 비쳐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린 햇살에 설핏 눈을 떴다. 웬디의 품에 안긴 마이클이 새파란 입술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천진하게 소년에게 물었다.


― 대장, 후크 선장은?

― 죽었어. 분하게도 스미 갑판장에게 당했어. 

― 뭐? 그럼 스미 갑판장은?

― 내가 처치했어. 나는 피터 팬이야.


소년은 희미하게 웃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스르르 다시 감은 눈에 아버지의 목선이 보였다. 목선 위에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검은 망토에 삼각 해적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웃고 있었다.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소년의 귓가를 맴돌았다. 바다가 보였다. 망망대해였다. 바다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탄 목선이 맴을 돌며 소용돌이치는 바닷속으로 휙 빨려 들어갔다. 후다닥, 급하게 달려오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 김 형사, 빨리 애들부터 옮겨. 저체온증이야. 애들이 위험해.


소년은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아버지의 목선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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