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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Apr 14. 2022

굿바이 박 팀장_01

워킹맘에서 전업주부를 선택하기까지

1978년생. 97학번.

건축을 전공했으나 주로 해 왔던 일은 글쓰기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업무였다. 에디터라 불린 적도, 콘텐츠 기획자로 분류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소위 클라이언트 잡(client job)을 주로 했다. 일할 당시 고객과 상사, 동료들의 평가는 "오~ 일 좀 하는데~~~"


마지막 정규직 출근은 2015년 11월의 어느 날. 그 후 7년째 프리랜서로 매해 1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음...이라고 썼으나, 저 문장 뒤에는 꽤 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관객과 주인공(나)만 아는 주인공의 혼잣말이랄까.


아이가 유치원 때

직장을 그만둔 직후였다. 책임과 역할이 큰일이 들어왔다. 제법 폼도 나고 수익도 났다. 하지만 2개월 만에 깨달았다. 엄마와 박 팀장, 살림과 일의 균형을 유지하며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는 건, 정말 빡세구나.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14시 이후에는 사실상 업무 회의나 전화가 불가능했다. 


"저는 오전 9시부터 14시 사이에만 미팅도 전화도 가능해요" 


사정을 설명한 후 일을 시작해도, 일이란 놈은 9 to 6가 일반적이라 나만 뺀 모두의 근무시간엔 자주 전화가 왔다. 킥보드 타고 질주하는 아이 뒤를 쫓으며 숨이 턱에 차올라 헉헉거리며 전화를 받기도 했다. 뽀로로 노래가 귀 아프게 울리는 키즈카페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뚜껑 덮은 변기 위에 수첩을 놓고 수정사항을 받아 적은 날도 있다. '이것만, 여기까지만' 하며 일을 하다 아이의 유치원 하원 시간을 놓친 적도 여러 번. 


"엄마, 오늘은 늦지 마. 꼭 다른 친구들 집에 갈 때 데리러 와야 돼." 

아이는 자주 내게 당부했다. 


당시의 나를 상대가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없다.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미친년 널 뛰듯" 내가 내린 당시의 나에 대한 평가다. 


수정사항을 받아 적은 마트 영수증을 얼결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한밤중에 야무지게도 입구를 묶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다 보면 울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매친(미친) 년 널 뛰듯"


"우리 치킨 파티할까?" 아이에게 치킨으로 저녁을 차려주고, 기름 묻은 손가락으로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이건 아니야. 정말 아니야. 책임과 역할을 줄이기 시작했다. 박 팀장에서 박 대리로 박 대리에서 박주임으로. 자발적 강등을 시작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건 시켜만 주세요. 끝내주게 해 보일 게요." 기세 등등했다. 

유치원 시절엔 예고 없이 아픈 날도 많았고, 이유도 말하지 않고 유치원 안 갈 거야 버티는 날도 잦았다. 한데 초등학생이 되더니 7시 40분에 일어나, 8시 30분이면 집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방과 후 수업도 체스, 배드민턴, 미술 3개나 하고 싶다 하여 주 3일은 오후 3시까지 나만의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 이제 일할 수 있어요. 오전 근무도 가능해요." 옛 직장 동료, 선배, 상사들에게 열심히 알렸다. 일이 왔고 열심히 했다. 신나고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음표들이 생겨났다.


물음 1. 분명 일을 하는데, 왜 자꾸 적자?

자주 택시를 탔다. 주차장을 찾아 헤매는 시간, 지하철 환승구간 이동하는 시간을 아껴야 했다. 숨 가쁜 아침을 진정시키고, 미팅 자료도 다시 확인하려면 내가 아닌 남이 운전해 주는 차를 타야 했다. 

밥도 반찬도 자주 사 먹었다. 아이도 먹여야 하니까 건강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곳들을 선별. 몸에 좋고 집밥에 가까운 정성이 느껴지는 곳들은 대부분 가격이 높았다.

 

물음 2. 우리집에서 내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저녁 장을 보고, 계단을 올라 5층 우리집 현관 문을 열 때면 언제나 기도했다. 


'제발 제게도 우렁각시 한 명만 점지해 주세요. 이 문을 열면 모든 것들이 단정하게 우리를 기다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해 주세요.'


과연 현실은?!  어떤 날은 미처 개지 못했던 이불에 화장실 전등까지 켜져 있기도 했다. 간단히 밀키트로 저녁을 대신하려 해도, 설거지함을 차지하고 있는 그릇들과 냄비 등등을 씻어야만 재료를 씻고 다듬을 수 있으니 한숨이 나왔다. 빨래함에 걸쳐진 양말 한 짝조차 내 손이 닿지 않으면 몇 주째 그대로인 상황에 자주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과 아득함을 느꼈다.


물음 3. 나 원래 이렇게 사납고/날카롭고/폭력적이었니?

"쫌 빨리 오라고. 쫌 쫌 쫌." 아이와 나의 바이올린 수업이 있는 날. 레슨에 늦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나는 아이를 재촉했다. 어린이용 1/4 바이올린은 왼쪽 어깨에, 성인용 바이올린은 오른쪽 어깨에 메고, 물이며 악보 등등 넣은 에코백을 손에 든 나는 아이의 손을 잡을 여력이 없었다. '이제 1학년이나 되었는데 계단쯤은 혼자 내려가야지.' 생각했다. 그 순간 아이가 앞으로 굴렀다. 우당탕탕 쾅! 

'아. 망했다.' 머리건 코건 어딘가 크게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바이올린 가방을 내던진 채 아이를 향해 달려 내려갔다.


"삼신할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진짜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는 다행히 손바닥이 조금 까지고 이마에 멍이 든 것 외에는 다른 상처는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악다구니를 썼다.


"토요일이잖아. 당신만 집에 있었어도 나 혼자 바이올린을 이고 지고 애까지 데리고 레슨을 가지는 않았을 거야. 아니 다 필요 없고, 엘리베이터만 있었어도 애초에 계단을 그런 식으로 내려가지 않았도 되었잖아. 그래, 그러니까 왜 이따위 재건축 아파트를 사서는... 금방 재건축될 거라며. 2년만 살면 될 거라더니, 도대체 몇 년이야. 아 몰라. 다 당신 때문에. 전부 모두 당신 때문이야." 


순간순간 나는 날카롭게 소리쳤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야말로 고함쟁이 엄마, 고함쟁이 아내였다. 


+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이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나는 모든 일을 접기로 결심하게 된다.


아이의 그 한마디는 다음 글에서. 


to be continued...



https://brunch.co.kr/@c5b8a332c4694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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