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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Apr 16. 2022

굿바이 박 팀장 02

워킹맘에서 전업주부를 선택하기까지

퇴사 후, 한 달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2015년,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인(?)이 되었다. 처음 몇 주는 여전히 직장인이던 시절처럼, 문자가 오고, 전화가 왔다. 나의 퇴사를 알지 못하는 협력사 관계자에게 연락이 오거나, 협업 제안을 위한 이메일이 도착하기도 했다. 하나하나 성실하게 답했다. 부재중 전화에는 바로 콜백을 했다. 퇴사를 알리고 "그간 고마웠습니다." 작별인사도 전했다. 협업 제안 이메일에는 관련 담당자 컨택포인트를 회신하고, 해당 제안서를 후임자에게 전달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동안 잘 살았구나' 괜스레 뿌듯했다.


박 팀장은 사라졌다

한 달이 넘어가자 바쁘게 울리던 전화도, 매일 아침 나를 찾던 이메일도 사라졌다. 걸려오는 전화라곤 남편, 친정엄마, 택배기사님. 이렇게 세 사람이 전부. 문자도 카톡도 잠잠. 처음엔 좋았다. '아... 이제야 평온하네.' 


하지만 곧 쓸쓸해졌다. 이렇게 잊히는구나. 박 팀장은 사라지는구나. 처음 알았다. 일하는 나를, 박 팀장을 나는 생각보다 훨씬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 초등학교 입학 후 다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좋았을까. 비록 정식으로 회사에 소속된 인력은 아니라도 내 이름 박힌 명함을 받았을 때는 주책맞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홉 살 아이가 외쳤다

노트북 가방을 이고 다니며 일을 했다. 아이가 책을 읽는 도서관 어린이실 구석에서, 키즈카페 테이블에서, 맥도널드에서. 아이는 자주 물었다. "엄마 또 마감이야?" "언제 끝나는데?!!!" 매일 함께 있는데도 "나랑은 안 놀아 주고. 엄마는 왜 맨날 일만 해." 입을 삐죽거렸다. 


그날은 편집 시안 확인 후 디자이너에게 바로 회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였다면 커다란 모니터에 수정전 수정후 파일을 동시에 띄워놓고 한눈에 확인이 쉬웠을 테지. 하지만 나는 소속 없는 프리랜서. 커다란 모니터도 나만을 위한 책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따라 아이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당시 우리집에는 TV가 없었다. 영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기라곤 핸드폰과 노트북이 전부. 노트북에는 수정후 시안을, 핸드폰엔 수정 요청 사항을 띄워 두 화면을 대조하며 확인해야 했던 나는 아이의 요구를 받아줄 수 없었다. 


"30분만. 30분만 있다가 보여줄게. 빨리 디자이너 이모랑 통화해야 한다니까. 엄마 좀 봐주라, 쫌!!!"  

 

"왜 자꾸 나한테만 참으라 하는데. 왜 나만 봐줘야 하는데."

따져 묻던 아이는 그간의 서러움이 밀려오는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거실에 내버려 둔 채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아이의 뽀로로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디자이너와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 든 건 시크릿 쥬쥬 연필, 엉덩이 밑에 깔린 건 아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 벤자민, 발끝에 걸리는 건 아침에 등교하며 아이가 찾다가 못 찾은 헤어밴드.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건지 짜증이 밀려왔다.


통화내용을 받아 적은 업무용 노트 곳곳에는 아이의 그림, 아이의 낙서가 있었다. 언제 붙인 건지 모를 반짝이 하트 스티커 아래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사랑해. 


거실로 나가니 울며 화내던 그 자리에 그대로 누운 채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을 덮어주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을 살자. 내일도 모레도 아닌 오늘 지금 행복하자.'


가장의 무게란 이런 것

회사를 그만 둘 당시, 나를 아끼던 선배들, 특히 워킹맘 선배들이 안타까워했다.

"선영아, 이제 조금 있으면 아이 초등학교 입학할 거잖아. 다 키웠는데, 조금만 버티면 되는데, 왜 하필 지금."

"이렇게 그만두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 조금만 더 버텨. 그럼 또 길이 보여."

알지. 안다. 선배들의 그 마음, 그 염려 너무 잘 안다. 


나라고 아쉽지 않았을까. 두렵지 않았을까. 무서웠고 두려웠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렵고, 나의 일을 너무 사랑해서 아쉬웠던 건 아니다. 당장 돌아올 카드대금 고지서가 무서웠다. 어깨 위에 올라타고 있는 대출금이 두려웠다.


어차피 '엄마' 대신 '박 팀장'을 택한 거라면 기왕이면 더 이름값 높은 회사, 기왕이면 더 높은 연봉받고 일하자 작정하고 이직한 지 9개월 만에 낸 사표였다. 업계에서는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던 회사였다. 해당 회사로 이직 후, 생전 연락 없던 사람들이 연락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직 비법(?)을 궁금해했다. 회사가 가진 이름값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나는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기도 했다.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던 그해,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설계사무소를 시작했다. 

"여보, 미안한데 집 담보 대출 이런 건 절대 안 돼요. 대신 1년간 생활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인사팀에 서류를 사인하러 갔는데 인사팀장님이 웃으며 "남편이 사업 하시나 봐요." 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서류를 살펴보니 내 이름 아래 남편, 딸, 친정부모님까지 네 사람이 있었다. 가장의 무게란 이런 거구나. 인사팀을 나오며 생각했다.


업무 관련 모임에서 새로운 회사 명함을 내밀면 사람들은 "어, 여기 다니세요?" 호감을 표했다. 좋았다. 뿌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사실 나는 매일이 전쟁이요, 고군분투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 옛 회사의 동료, 선배가 그리워 회사 화장실 한 켠에서 훌쩍거렸다. 


사실 이직 몇 주 만에 알았다. '여긴 내 길이 아냐. 내게 맞는 옷이 아니었어.' 하지만 외면했다. 통장에 찍힌 인상된 월급, 내 이름 아래 줄 서 있던 남편, 딸, 친정부모님. 그리고 남편 대신 책임지기로 한 우리집 생활비. 그들이 나를 버티게 했다. 


약사님은 말했다 "큰 병원에 가서..."

<카운트다운 100 days> 오직 버티기 위해, 사직서를 쓰지 않기 위해, 내가 나를 위해 만든 작은 이벤트. 매일 1일, 2일, 3일 버텨내는 날들을 달력에 표시했다. 100일에 도달하면 나는 내게 조금 사치스러운 선물을 했다. 첫 번째 100일은 성공. 두 번째 100일도 가까스로 성공. 3번째 100일만 채우면 더 큰 선물이 약속되어 있었건만...


퇴사를 결심한 것은, 회사 앞 약국에서였다.

오래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툭툭 터져 나오는 작은 신호들이 모여 그날 그곳에서 '펑'하고 터졌던 것뿐이다. 


"저...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는 건 어떨까요?"

약사님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건네받은 소화제의 뚜껑을 열던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약사님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거 아세요? 매일 2시만 되면 약 사러 오시는 거. 매번 속이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를 찾으시잖아요. 벌써 한 달도 넘었어요. 제 생각에는..."


머릿속의 먹구름이 한순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손에 쥔 소화제를 마시지 않아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약사님. 정말 감사해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약사님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약국 문을 열고 나오다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는 병이에요. 어떻게 해야 낫는지도 방금 약사님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연차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추석 연휴에 4일을 더해 휴가를 신청했다. 4일간의 휴가.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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