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춤추고 싶을 만큼 멋진 말인가
01
미국에서 2년 가까이 살았다. 유학? 아니. 이민? 아니. 그냥 살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일하셨던 아빠와 함께, 일리노이에서 유학하던 언니와 함께.
그때 내 나이 24세. 2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취업을 하려고 보니 어느새 나는 27세가 되었다.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다. 이력서를 쓰고 또 썼다. 100통 가까이 이력서를 썼을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후 면접으로 이어지는 빈도가 늘었는데 이번엔 면접을 보는 족족 떨어졌다.
모든 면접관들이 빼놓지 않고 건네던 질문. "미국에서 2년 동안 뭘 했어요?"
'이번에도 떨어졌구나' 터덜터덜 거리를 걷는 날이 빈번해 지자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그냥, 학위라도 하나 따 올걸.'
자꾸자꾸 같은 질문을 하니까, 자꾸자꾸 답을 생각하게 되더라.
미국에서 저는... 어덜트 스쿨에 다녔어요. 수강료가 무료였거든요.
sign language 수업을 신청했는데, sign=사인물 이라고 이해해 건축전공인 저와 잘 맞을 줄 알았어요. 언어가 부족하니 차라리 그림은 좀 낫겠지 라는 계산도 했구요.
수업 첫날 삼각자, 색연필, 스케치북을 챙겨 갔어요. 그런데 왠일? sign language는 수화 수업이었어요. 영어도 못 하는데 수화를? 쉬는 시간에 살그머니 강사 선생님에게 가서 짧은 영어로 상황을 설명했어요. 그랬더니 강사쌤이 큰 소리로 "얘 수업 그만둔데~"라며 수강생들에게 말했지요.
강의실 안의 할머니들(수강생 80%가 할머니)이 사방에서 영어로 왜 그만두냐 물었어요. 이 수업이 디자인 수업인 줄 알았고, 나는 영어를 잘 못하고, 그래서 수화를 배우기는 더더더 어렵고... 등등을 설명하기엔 나의 영어실력은 턱없이 부족했지요.
하는 수 없이 아주 간단하게 "I don't have a car. It is very hart to come bere by bus."라고 답했지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들은 제게 집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더니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그러더니 한 할머니가 제게 스케줄러를 보여주며, 월수는 죠앤이 금요일엔 엔지가 너를 데리러 갈 거라고 하는 거예요. 당황한 제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걱정마, 집에 갈 때도 우리가 집까지 태워줄거야."
그렇게 얼결에 미국에서 수화를 배우게 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집근처 쇼핑몰과 디즈니랜드와 식스플래그 등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에 맞춰 수화공연을 하기에 이릅니다.
변호사와 싸웠어요.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에 항의 편지까지 보냈습니다.
오랜 거래처였던 미국 회사로 부터 인수 제의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아빠는 한국인 변호사를 고용했어요. 아빠가 변호사 사무실에 가던 첫날 부터 늘 따라갔어요. 어느날 부턴가 약속시간엔 늘 변호사 대신 로스쿨에 다닌다는 이민 2세만 있더라구요.
틀림없이 한국말을 다 알아들으면서도 영어로 다다다 엄청 빨리 이야기 하는 아주 얄미운 녀석이었어요. 한번 두번 변호사에게 바람 맞는 횟수가 늘어나던 어느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저는 한국말로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경우가 아니죠. 우리집에서 여기까지 차로 1시간인데... 도대체 변호사님은 언제 오시는 거죠? 정말 오시긴 오시는 건가요? 이게 도대체 몇 번째예요?"
다다다 한국말 총알을 장전한 채 멈추기 않고 쏘아대자 당황한 녀석,저희 아빠를 향해 딸 좀 말려보라는 제스춰를 취하며 이렇게 말했죠. "헤이 미스터 박" 녀석의 헤이가 전투본능에 불을 붙여 버렸어요.
"당신은 장유유서도 몰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를 시작으로 정말 한문시간에 배운 사자성어란 사자성어는 다 끌어다 썼어요. 왜냐하면 저는 알았거든요. 녀석이 사자성어 앞에서 얼어버린다는 걸. 미국 친구가 알려준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버렸어요.
"I will sue your boss!"
그 후 변호사가 아빠를 바람맞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금도 후회해요. 옆집 엔젤라 아주머니가 소개해 준, 이탈리아인 변호사로 바꿨어야 했는데...
동네 도서관에서 한글책 정리를 했어요. 학교도 안 다녀, 친구도 없어. 신기하고 재미난 미국 마트 구경도 한 두 번이고, 결국 저는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사는 동네라 도서관에도 한글책이 꽤 많았어요. 문제는 어린이섹션에 성인책이 성인용 서가에 어린이책이 있는 등 두서없이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게요?
"제임스. 이건 요리책이예요. 어린이책이 아니라."
"제임스 이건 시집이예요, 어린이책이 아니라."
자꾸 그랬더니 제임스가 미안해 하며 말하더라구요.
"미안, 써니. 내가 한글을 몰라서. 우리 도서관에 한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분류를 정확하게 할 수가 없었어."
매주 토요일 마다 도서관에 가서 한글책 분류작업을 했어요.
주말이면 아빠를 졸라 garage sale을 구경 다녔어요. 매주 다니다 보니 어느 동네 세일을 가야 할지, 어느 동네 세일은 피해야 할지 기준이 생기더라구요.
언덕 위에 있는 큰 저택들은 종종 마당 뿐만 아니라 집 안 까지 개방하곤 했는데 그런 날에는 미술관에 온 듯 물건 하나하나, 공간 구석구석 구경했어요. 그리곤 상상했죠. 이 오븐을 이 그릇을 이 책을 고르고 수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이 커지면 집주인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물건으로 상상했던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어요.
언니가 있는 일리노이로 옮겨가서는 college에 다녔어요. 학교를 입학하면 꽤 두꺼운 학교안내책자를 주는데, 도서관에 앉아 꼬박 반나절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그 책을 꼼꼼하게 읽었어요.
영어가 부족하니까, 친구가 없으니까 책이 제겐 전부였어요. 강의실, 식당, 화장실 위치 부터 각종 행사나 아르바이트 정보를 모아두는 게시판 위치까지 모두 책을 통해 익혔어요. 그곳에선 도서관에서 학생 어시스턴트로 일도 했어요. 모집 공지를 보고 도서관으로 갔던 날을 기억해요.
"나는 인터내셔널 스튜던트예요. 그런데도 지원이 가능한가요?"
사서 선생님은 저를 도서관장실로 데리고 갔어요. 관장님은 확인 해 보겠다며 몇 군데 전화를 했어요. 그리곤 가능하다고 알려주며 꼭 신청하라 했어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생각해 보겠다 답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써니, 지금 너는 누구와 이야기 하고 있지? 너는 지금 내게 영어로 말했고 나는 네 말을 다 알아들었어. 그거면 충분해."
서류를 접수했고 면접을 통과했어요. 관장님에게 감사인사를 하러 갔던날 양 팔을 벌려 나를 포옹하며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써니, 네가 우리 도서관 1호 인터내셔널 스튜던트야. 네 덕분에 다른 인터내셔널 스튜던트들도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될 거야. 정말 고마워. You made my day."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관장님은 내게 추천서를 써 주었어요.
이 외에도 줄줄줄인 미국에서 한 일 5, 6, 7....
얼마전 취재한 인터뷰 기사가 웹매거진에 퍼블리싱 되었다. 나보다 먼저 기사를 본 인터뷰이 중 한 분이 문자를 보내주셨다.
저 메시지를 받고선 나도 모르게 귓가에서 "You made my day!" 외치며 나를 안아주던 도서관 관장님이 떠올랐다. 동시에 "미국에서 2년 동안 무얼 했느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질문을 던지던 면접관들도 생각났다.
지금의 내가 스물 일곱 살이라면, 주눅 들지 않고 말해 줄텐데.
자랑스럽게 내보일 학위증 하나 없지만, 나의 2년은 가치 있었다고. 나는 그 2년 동안 누군가를 응원하는 법/ 부당함에 목소리 높이는 법/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관찰하는 법 등등 학교에서는, 교과서에서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던 것들을 배웠노라고. 당당하게 말해 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