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민의 방
김 대표가 사무실을 다녀간 후 송 과장은 지민과 연락이 닿지를 않았다.
걱정이 된 송 과장은 한걸음에 지민의 집으로 달려왔다.
벨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깜깜했다.
거실의 불을 켜고 주위를 둘러보자 지민이 소파 옆 구석에 넋을 잃고 앉아 있었고 거실 바닥에는 온갖 종류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깊은 한 숨을 뱉은 후 송 과장은 지민 곁에 다가갔다.
“지민아...”
지민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지민아~”
지민의 눈은 생기를 잃었다.
그런 지민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속이 상한 송 과장은 지민을 잡아 흔들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서지민... 너 이런 애 아니었잖아.”
송 과장의 말에 지민이 송 과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어떤 앤 데?”
“너 여태껏 내 속 한 번 썩인 적 없는 착하고 성실한 놈이었잖아... 너의 그런 반듯한 모습을 팬들이 좋아하는 거고.”
“팬? 내 팬? 내 팬인데 왜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해?”
“지민아... 제발... 예전의 너로 돌아오면 안 될까? 형이 이렇게 부탁할 게... 착실하기만 하던 네가... 방은 이게 무슨 꼴이야...”
“형... 나 이제 못 돌아가...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어...”
지민의 말에 송 과장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고 지민의 눈가도 이내 빨갛게 물들었다.
“지민아... 뭐라도 먹었어? 먹고 술 마신 거야? 내가 나가서 뭐 사 오까?”
“그보다 형...”
“응. 말해.”
“나... 설이...”
“설이... 뭐?”
“설이가 너무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형... 나 어떡해?”
지민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이내 울어버렸고 송 과장은 말라버린 지민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지민아... 너를 어떡하면 좋니... 진짜...”
한참을 그 자세로 울던 지민이 고개를 들어 송 과장에게 말했다.
“형... 나 한 번만... 딱 한 번만... 설이 얼굴 보면 안 될까? 응? 형...”
“무슨 말이야... 지민아... 이 상황에 어떻게 한 설 작가를 본다는 거야... 안 되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는데... 잘 아는데... 안 보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아... 한 번만...”
“지금 한 설 작가 만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땐 진짜 끝이야... 모든 게 다 끝난다고 지민아...”
“그럼 먼발치에서라도 잠시라도 보면 안 될까?
설이가 잘 있는 거 딱 그것만 확인하면 안 될까?
그러고 나면 나 정신 차릴 게... 약속할 게 형...”
송 과장은 지민의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후 지민에게 말했다.
“지금 한 설 작가와 연락을 할 수는 없어... 김 대표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진짜 너를 죽일 수도 있고, 너 이 바닥에는 다시 얼씬도 못하게 너 앞길을 밟아버릴 수도 있는 위인이야... 대신...”
“대신?”
“한 설 작가 집필실 앞이라도 가보고 싶다면... 거기에서라도 한 설 작가를 느끼고 싶다면... 그건 형이 들어줄 수 있어. 어때?”
“응! 응! 나 그렇게라도 할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불 켜진 집필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대신 지민아.”
“응. 형 말해.”
“그러고 나면 진짜 너 정신 차리는 거다.
예전의 착하고 성실하고 반듯한 우리 지민이로 돌아오는 거다. 형이랑 약속해. 알겠지?”
“응... 약속할 게... 바로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볼게, 형... 미안해...”
“그래 지민아... 그럼 나가기 전에 너 일단 좀 씻자... 명색이 배우인데... 꼴이 이게 뭐냐... 진짜 볼품없다 너... 혹시나 한 작가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도망가겠는걸?”
송 과장의 말에 깜짝 놀란 지민이 말했다.
“그 정도야? 안 되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민은 욕실로 들어갔고 지민이 씻는 동안 송 과장은 거실 바닥의 술병들을 치우며 나지막이 말했다.
“불쌍한 놈... 아오모리에 혼자 두는 게 아니었어... 하...”
송 과장은 차를 몰아 강남 시내를 빠르게 빠져나가 한 작가의 집필실로 향했다.
사이드미러로 지민을 흘끔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지민의 상기된 표정이었다.
집필실 근처를 가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지민은 차 창문을 열어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지민의 모습에 송 과장의 마음이 아려왔다.
‘김 대표도 내 마음과 같겠지? 아마 더 할 것 같긴 하네...’
“지민아... 창 문 닫아... 아직은 바깥공기가 차가워... 그러다 감기 걸린다.”
송 과장의 말에 지민은 창문을 닫았다.
“형... ”
“왜.”
“겨울은 언제 다시 올까?”
“어? 지금도 겨울인데? 봄은 언제 올까를 잘못 말한 거 아니야?”
“아니... 이 겨울 지나고, 봄도 여름도 가을도 지나고... 그러고 나서 오는 겨울 말이야... 그 겨울은 언제쯤 올까?”
“글쎄... 너무 먼 얘기라... 형도 모르겠는데... 아마 한참은 기다려야 할걸?”
“그렇겠지?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겨울은 왜? 무슨 할 일이라도 있어?”
“응.”
“뭔지 형이 물어봐도 돼?”
“약속했어...”
“무슨 약속?”
“설이랑 약속했어...”
송 과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민에게 물었다.
“설 작가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나중에 다시 보기로...
아오모리에 눈이 또 펑펑 내리면 그날이 우리가 다시 보는 날이다 생각하고 만나기로 약속했어...”
지민의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고 지민은 설과의 약속을 떠올리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던 송 과장은 말을 잊은 채 운전만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설의 집필실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난 후 송 과장은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아... 다 왔어.”
지민이 감고 있던 눈을 떠 집필실 건물을 올려다봤다.
불 켜진 몇몇 방들이 보였다.
저 불 켜진 방들 중 한 곳에 지금 설이가 있을 것이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니 지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형...”
“응?”
“설이 집필실은 몇 층이야?”
“7층... 저기 불 켜진 방 보이지? 7층에...”
“응.”
“저기야...”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지민은 눈시울이 따가운 것도 잊은 채 불 켜진 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형... 나 잠깐 차에서 내려도 돼?”
“안돼 지민아... 여기에도 기자들이 있어... 너 여기 온 거 들키면 끝이야...”
“알았어... 그냥 차 안에서 볼게... 그리고 형...”
“말해.”
“고마워...”
“그래...”
지민은 차의 네모난 창문을 통해 그녀의 집필실이 있는 건물의 7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것만으로도 지민은 너무나 행복했다.
비록 설을 볼 수도 얘기할 수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비워진 가슴이 메꿔지는 것 같았다.
그런 지민이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송 과장은 차의 시동을 끄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지민이 송 과장에게 말했다.
“그만 가자... 형...”
“그럴래?”
“응...”
송 과장이 차의 시동을 켜고 출발하던 순간이었다.
“잠깐만!!! 형!!! 잠시만.”
지민의 다급한 말에 송 과장은 차를 멈추었다.
“왜 그래 지민아!”
지민의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저기!! 저기 입구에... 설이 아냐?”
“응? 어디?”
지민이 손으로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고 송 과장이 입구를 보자 진짜 설이 건물을 나오고 있었고 설 옆에는 김도겸이 있었다.
김도겸을 확인하고 나니 그의 옆에 있는 깡마른 여자는 한 설 작가임이 틀림없었다.
잠시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형! 설이 맞지?”
“응.. 맞네... 한 설 작가.”
설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지민이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말랐어... 진짜... 미치겠네... 설이 왜 저렇게 말랐어... 안쓰러워 죽겠어...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잖아...”
지민은 소리 내어 울었고 가슴을 치며 울었으며 그녀를 마음에 담은 자신을 원망하며 울었다.
그런 지민을 보자 마음이 짠해진 송 과장이 말했다.
“지민아... 그만 울어... 너 형이랑 약속했잖아... 여기 오고 나면 괜찮아지기로 약속했잖아... 그리고 운 좋게 한 설 작가 얼굴도 봤고... 그러니 더 바랄 것도 없잖아...”
한참을 울던 지민이 말을 했다.
“형 말이 맞는데... 다 맞는데... 저렇게 말랐을지는 상상도 못 했어..
다 내 잘못인 거 같아서 맘이 너무 아파.. 형...”
“지민아... 한 설 작가도 지금 최선을 다해 견뎌내고 있는 중일 거야...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알면 한 설 작가도 많이 힘들어질 거야... 그러니 그만 울어...”
송 과장은 차의 시동을 다시 켜고 출발했다.
울던 지민은 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차의 창문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차는 건물을 지나고 있었고.. 이내 설이의 뒷모습이 점점 차와 가까워졌다.
지민은 한순간이라도 설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짝이지 않은 채 다가오는 설의 뒷모습을 쳐다봤고 차는 서서히 설 옆을 지나갔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설의 얼굴을 확인했다.
진짜 설이었다... 꿈에서도 깨어서도 그리워하던 설의 얼굴이었다...
복사꽃같이 빛나던 설의 얼굴이 시들어버렸지만 분명 보고 싶어 하던 설의 얼굴이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설의 얼굴을 보며 지민은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설이 앞에만 안 나타났어도... 설이 저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다 내 잘못이야...”
차는 이내 큰 도로가로 나와 지민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지민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울기만 했다.
‘송 과장?’
집필실 건물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겸과 설 옆을 지나는 세단을 무심코 쳐다보던 도겸은 그 차가 송 과장의 차임을 알아봤다.
그리고 그 차에는 분명 지민이 타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아마도 지민이 송 과장을 졸랐을 것이고 송 과장이 지민의 부탁에 여기까지 내달려 왔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옆에 걷고 있는 설의 얼굴을 보았다.
핏기도 생기도 다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은 설이 보였다.
홧김에 설의 얼굴을 못 보게 설을 가리고 싶었지만... 오죽할까 싶어 그대로 그냥 걸어갔다.
아마 지금 지나는 차 안에 지민이 타고 있다고 설에게 말을 한다면 설은 세상 끝까지라도 저 차를 따라가겠지?
맘은 아프지만 도겸은 설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