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설(雪)
#19. 초가을쯤 어딘가
시간이 약인지라 설과 지민의 가십거리도 조금씩 잦아들었고, 설의 확고한 뜻에 따라 영화는 여전히 지민을 주인공으로 다시 촬영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설의 소설은 어느새 중반부를 지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설도 지민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어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이어갔다.
둘 다 겨울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들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기뻐했지만 설과 지민은 둘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차게 내딛고 있었다.
지민은 영화가 그리고 설은 소설이 완성되어야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겨울이 오기 전 다시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끝내 놓아야 했다.
‘타닥타닥’
한참 키보드를 치던 설이 글 쓰기를 멈추고 달력을 쳐다보았다.
“왜요... 작가님?”
설을 쳐다보며 연수가 말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10월 마지막 날이에요.”
“그래? 시간이 다 되어가네...”
“네? 무슨 시간이요?”
“아... 아니야... 작품 완성할 시간 말이야.”
“작가님... 이상한 버릇 생긴 거 아세요?”
“버릇? 무슨 버릇?”
“가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달력을 쳐다봐요...
무슨 중요한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각인하듯이 달력을 쳐다봐요...”
“내가 그랬어?”
“자주 그러세요... 못 느끼셨어요?”
“응. 몰랐어...”
“왜 그렇게까지 작품에 몰두하세요? 뭐... 예전에도 그러시긴 했지만... 지금은 병적이다 싶을 정도예요.”
“빨리 완성해야 돼...”
“왜요?”
“늦으면 안 돼...”
“그러니까 왜요...”
“기다려...”
“뭘요... 누가요...”
“지민이가 기다려... 나를...”
설은 다시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지민이가 기다린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선 다시 작품에 몰두했다.
그런 설이 여전히 안쓰러웠지만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견뎌준 게 다행이다 싶어 연수는 더 이상 설에게 묻지 않았다.
지민이 다시 영화 촬영을 속개하면서 설과의 열애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김 대표와 MG소속사에서 미친 듯이 언론을 막은 탓에 그 얘기는 금세 시들해져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 갔고 그 덕분에 설과 지민은 자신들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도겸은 설의 아픈 모습도 그리고 설이 미친 듯이 글 쓰는 모습도 보는 것이 힘들어 집필실에 드나드는 횟수를 많이 줄였다.
그저 연수에게 설을 부탁할 뿐이었고 연수는 도겸의 마음을 잘 알기에 설의 곁에서 떠나지 않고 그녀 곁에 머물렀다.
어느덧 시간이 흘려 겨울이 왔고 설의 소설은 곧 탈고를 앞두고 있었다.
탈고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설은 더더욱 미친 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동안 그녀는 웃기도 하다가 씩씩대기도 하다가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창 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볼 가운데서 반짝거렸다.
이내 그녀는 마음을 다 잡고 다시 글쓰기를 반복했으며 어느덧 긴 시간이 지나 탈고를 앞두고 있었다.
“작가님.”
“왜.”
“배 안 고프세요?”
“응. 안 고파.”
“제가 떡볶이 해드릴까요?”
“연수야...”
“네?”
“곧 탈고할 거야... 탈고하고 나면 해주라, 떡볶이... 그때는 먹고 싶을 것 같아. 기다려줄 수 있지?”
“네... 알겠어요.”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졌다.
집필실 안의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드디어 멈추었다.
설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거두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방 안에서 잠을 자던 연수가 문을 열고 나와 설이를 보았다.
“작가님... 혹시...”
“응. 끝냈어... 다행히... 늦지 않게...”
“우와! 축하드려요 작가님!”
“응. 고마워... 너도 그동안 나 보살피느라 고생 많았어... 연수야...”
설의 말에 왠지 모르게 슬퍼진 연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지금 정작 울고 싶은 것은 설이 일 것이라 생각한 연수는 마음을 다 잡고 연수에게 말했다.
“대표님한테 전화해야겠죠?”
“아니야... 연수야... 아직 하지 마.”
“왜요?”
“하면 도겸이 당장 달려올 거야... 그럼 내가 못 쉬어... 나 좀 자고 싶거든... 자고 일어나서 그때 하자...”
“네. 알겠어요... 그럼 일단 좀 주무세요.”
“그전에...”
“네?”
“떡볶이 해주라... 탈고하고 나면 먹고 싶어 질거라 생각했는데 진짜 먹고 싶네.”
“이 시간에요? 아직 새벽인데?”
“응. 이 시간에... 먹고 싶네... 설이표 떡볶이... 마지막으로...”
설의 끝말을 다 듣지 못한 채 연수는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냈다.
일 년 만이다.
설의 입에서 뭔가를 먹고 싶다고 말을 한 게...
게다가 자신이 만들어 주는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한 게... 꼬박 일 년 만이었다.
연수는 다시 눈물이 핑 돌았지만 설이 잠들기 전에 어서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떡볶이를 만들었다.
“역시 맛있어... 이 맛이야...”
“그렇게 맛있어요?”
“응.”
“이 새벽에?”
“새벽이라 더.”
“그리웠어요?”
“그리웠어.”
“그런데 왜 말 안 했어요?”
“탈고하면 먹으려고 아껴뒀지...”
“별 걸 다 아껴... 그냥 해달라고 하면 되지... 다음에는 생각나면 그냥 말씀하세요... 아껴두지 말고...”
“응... 다음에는... 말할게...”
연수가 만들어 준 설이표 떡볶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난 후 설은 잠이 들었다.
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연수는 집필실 밖을 나왔다.
계속 설과 같이 있는 바람에 통 집을 들리지 못했다.
설이 깨어나기 전 얼른 집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 모습이... 설의 잠든 모습이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연수는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연수가 밖을 나가자 설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TV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눈이 온다고 했다. 일본에는 더더욱 많은 눈이 온다고 했다.
설은 직감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임을... 연수가 돌아오기 전에 나가자 생각을 하고... 간단히 짐을 챙겼다.
노트북에서 그동안 쓴 원고를 USB로 옮겨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리고 원고를 두 부 출력하여 한 부는 USB 옆에 두고 나머지 한 부와 노트북은 가방 안에 넣었다.
꼭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설은 주변을 정리했다.
흰 패딩에 하얀색 스키 바지와 부츠를 신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설의 마음이 급해졌다.
파란색 비니를 쓴 후 설은 조용히 집필실을 빠져나와 공항으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띠띠 띠~’
‘찰칵’
집필실 문을 열고 연수가 들어왔다.
행여 설이 깰까 봐 조심히 살금살금 걸어 안으로 들어왔다.
장을 조금 봐온 터라 일단 물건들을 냉장고 안과 싱크대 상부장에 정리를 하였다.
설이 깰까 봐 아까 먹고 그대로 둔 그릇을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주무시나? 하긴 몇 달을 하루에 몇 시간도 채 자지 않고 글만 써 댔으니...
한 이틀은 주무시겠지? 대표님한테는 언제 전화하지...’
설거지를 마친 후 테이블 가까이에 다가갔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원고와 USB를 발견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원고를 집어 들었다.
‘설(雪)’
그녀가 꼬박 일 년을 매달린 소설의 제목이 설(雪)이었다.
지민씨와의 사랑 얘기라고 했다.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녀가 아오모리에서 돌아온 후 단 한 번도 연수는 설에게 아오모리에서 있었던 일을 묻지 않았다.
괜찮아지면 언젠가 그녀가 먼저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대했던 대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 원고에 모두 쏟아냈다.
이 원고를 다 읽으면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원고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원고를 읽어 내려간 연수는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은 후에야 원고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설 속의 설이 불쌍하고 가여웠다.
이 모든 아픔과 슬픔을 지닌 채 그녀가 어떠한 마음으로 이 일 년을 버텨왔는지, 그 모든 이야기들을 어떤 심정으로 이 원고에 쏟아냈는지 그리고 그동안 왜 그렇게 이 소설에 몰두하며 미친 듯이 써내려 갔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소설 때문에 차마 죽지 않고 견뎌온 것이었다.
그녀의 슬픔과 아픔은 연수가 생각한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 소설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망가졌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너무나 불쌍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인 지민도 너무나 불쌍했다.
둘의 사랑이 너무나 가슴이 아파 연수는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울었다.
문득 곤히 잠들어 있을 설의 마른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연수는 조심히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닦은 후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설이 없다.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가지런히 프린트되어있는 원고며 USB며, 그것들을 보고 왜 바로 눈치채지 못했나 자신을 책망했다.
그녀는 소설을 완성하고 나서 다시 아오모리로 떠난 것이라고 연수는 직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넷 검색을 하였다.
아오모리에 대설특보가 내려진 것을 확인하자 연수는 설이 그곳으로 갔음을 확신했다.
연수는 도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수야... 왜? 설이에게 무슨 일 있어?”
“작가님 탈고하셨어요.”
“아! 진짜? 이렇게나 빨리?”
“네.”
“내가 당장 갈게... 아... 사실은 나 지금 미팅 중이라 바로는 못 가는데.. 설이 지금 뭐 하고 있어?”
“없어졌어요...”
“뭐?”
“작가님 사라지셨다고요.”
연수의 말에 놀라 도겸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사라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내 전화기에서는 연수의 하염없는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연수야... 그만 울고 차근차근 말해봐... 응? 연수야... 제발...”
도겸의 다급한 말에 연수는 겨우 울음을 참고 말했다.
“작가님 탈고하시고 잠시 주무신다길래 제가 집에 좀 다녀왔는데... 돌아와 보니 작가님이 안 계셨어요.”
“뭐야? 대체 어딜 간 거야!”
“책상 위에 그동안 쓰신 소설이 올려져 있는데... 아마 그리로 가신 것 같아요.”
“거기가 어딘데... 혹시... 아오모리?”
“네...”
그 순간 설이 평소 입버릇처럼 하던 지민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아마 설은 탈고 후 지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오모리로 향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겸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이 그날 임이 틀림없었다.
겨우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던 설이 그곳으로 가 다시 지민과 만난다면 설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 분명했고 겨우 잠잠해진 그 둘의 열애설은 기름을 부은 듯 다시 활활 타올라 설을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야... 일단 진정하고 전화 끊어 봐... 내가 아오모리로 지금 갈게.”
“지금 하고 계신 계약 건은 어쩌시고요...”
“계약이 문제가 아냐... 이대로 뒀다간 설은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니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도겸은 전화를 끊고 급히 회의실을 나갔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갑작스레 내린 눈 탓에 도로는 차들로 막혔고 도로 옆 길가는 급히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설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데리러 갈게... 이번에는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한 도겸은 차를 주차한 후 공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설은 언제 떠난 것인지 공항 안에 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오모리행 비행기를 탔음이 분명했다.
도겸은 데스크로 달려가 급하게 말했다.
“아오모리행으로요... 최대한 빠른 비행기로...”
“죄송합니다, 고객님... 아오모리행 비행기는 폭설로 모두 결항입니다.”
도겸은 앞이 깜깜해졌다.
“결항될 정도의 눈은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아오모리는 이미 많은 눈들로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얼마나 기다리면 갈 수 있나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도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공항 안의 많은 사람들이 도겸을 쳐다봤지만 도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한참을 그대로 주저앉아있었다.
지민은 모든 영화 스케줄을 끝내고 소속사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지민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설이 소설을 끝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민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영화를 끝내는 동안 설 또한 소설을 완성했을 것이라고.
얼른 아오모리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가득 담아 안고 그녀가 완성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그 순간을 위해 지민은 안간힘을 다해 꼬박 일 년을 기다리고 참아왔다.
이제 드디어 그때가 된 것이었다.
송 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민이 송 과장을 보며 말을 했다.
“형... 나 영화 촬영도 끝났으니까 당분간 좀 쉬어도 되지?”
송 과장이 지민을 힐끗 보며 말했다.
“왜... 어디 갈려고... 무슨 약속이라도 있어?”
“아니...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조금 휴식하려고 그러지... 항상 그래 왔는데 새삼스럽게 뭘 물어...”
“아니... 항상 그래 왔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러실까... 지금부터 밀린 인터뷰 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달려야 해... 오늘 오후만 해도 약속되어있는 인터뷰가 세 건이나 된다고...”
“하... 그럼 언제쯤이나 나 쉴 수 있어?”
“일단 인터뷰들 다 소화하고 잡혀있는 화보도 몇 개 촬영해야 하고...”
“그래서 언제쯤 끝나는데... 나 쉬고 싶어... 형... 스케줄 좀 다 몰아서 빨리 끝내면 안 될까?”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 과장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지민에게 말했다.
“알았어... 최대한 스케줄 몰아서 할 수 있도록 조정해볼게.”
“응. 고마워... 형...”
“대신... 너도 인터뷰랑 화보 촬영 끝날 때까지 딴생각 안 하고 집중하는 거다.”
“응... 그렇게 할게...”
송 과장은 지민과의 대화를 끝내고 사무실 밖을 나갔다.
홀로 사무실에 앉아 있던 지민은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뉴스에서 폭설 예고를 하고 있었다.
지민은 예고를 보며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뉴스에서 아오모리의 폭설 장면이 보도되었다.
많은 눈이 내린 아오모리는 작년 이맘때 모습 그대로였다.
TV로 아오모리의 모습을 본 지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기에 분명 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벌써 아오모리에 도착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지민은 공항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오모리행 티켓 예약 좀 부탁드립니다....
네? 결항이요? 아... 그럼 언제쯤... 네 네... 그럼 일단 예약 좀 해주세요... 네네... 바로 연락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어차피 지금은 결항이라 아오모리로 향할 수가 없었다.
며칠 내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공항직원의 말을 듣고 지민은 그동안 모든 스케줄을 끝내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소파에 있는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스카프를 꺼냈다.
설의 스카프였다.
스카프에 얼굴을 파묻으며 지민은 생각했다.
이번에 아오모리에 돌아가 그녀를 다시 만나서 이 스카프를 전해줘야지... 다시 만나면 꼭 전해줘야지... 그리고 또 기사에서 난리 나겠지? 이번에는 절대 그녀를 놓지 말아야지...
지민은 이번 영화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작품이 그녀의 작품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배우를 그만두어야 그녀의 옆에 머물 수 있음을 확인한 지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 옆에 있기로 결심했다.
‘설아... 조금만 기다려... 날이 추우니..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펜션 안에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곧 그리로 갈게... 이번에는 절대 너를 놓치지 않을 거야... 다시는 너를 울리지 않을 게... 나의 여신님...’
지민은 소파에 앉아 설의 스카프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도겸이 집필실 안으로 들어왔다.
놀란 연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예요, 대표님? 작가님은요...”
“설이는 이미 아오모리로 간 것 같아...”
“네? 그런데 대표님은 왜 돌아오셨어요?”
“결항이야... 며칠은 기다려야 한대...”
“결항이요? 아... 제가 조금만 더 일찍 전화드릴 걸...”
연수가 울기 시작했다. 그런 연수를 다독이며 도겸은 말했다.
“무슨 말이야... 설이 없어진 거 확인하자마자 전화한 거 아니었어?”
“그게...”
연수는 도겸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작가님 원고가 테이블 위에 있어서 읽어보느라 몇 시간을 지체했어요... 테이블 위에 원고가 있었을 때 제가 눈치챘어야 했는데... 너무 읽고 싶은 마음에...”
“그래.”
도겸은 원고의 첫 장을 보았다.
‘설(雪)’
눈이며 설인 첫 글자가 보였다. 이내 도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겸은 테이블에 앉아 설의 원고를 읽었다.
연수는 행여나 방해가 될까 도겸에게 커피를 건네준 후 조용히 자리를 비켜 테이블 끄트머리에 가서 앉았다.
도겸은 연수가 준 커피를 마시며 설의 원고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설이 말한 지민과의 사랑이야기... 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 이야기가 도겸도 궁금했다.
분명 읽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겠지만 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지더라도 도겸은 알아야 했다.
설이 왜 그토록 아파했는지, 힘들어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도겸은 설을 치료해주든 포기를 하든 어떠한 결정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 후 원고의 마지막 장을 넘긴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저 건너편 어딘가에 홀로 앉아 지민을 기다릴 설을 떠올렸다.
이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둘의 사랑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가슴 절절했다.
지민과의 사랑 얘기에 질투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사랑을 가슴에 품고 미어졌을 설이 불쌍했다.
이제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던 작은 새 한 마리를 하늘로 날려 보낼지 아니면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헛된 기대를 하며 그대로 새 장 속에 가둘지 도겸은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한참 눈물을 흘리던 도겸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곤 결정을 내렸다.
작은 새를 하늘 위로 날려 보내기로...
도겸은 양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설의 손수건...
작고 귀여운 노란 새가 수놓아져 있던 손수건을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다. 손수건이 없다.
손수건을 설이라 생각하고 중요한 계약 건이 있는 날이면 부적처럼 항상 가지고 다녔었는데...
오늘 오전만 해도 분명 주머니에 있었는데... 없다.
양복 주머니뿐 아니라 바지 주머니 어디에도 손수건이 없었다...
아! 공항! 공항에서 뛰어다니며 설을 찾아 헤매고 티켓을 구하기 위해 데스크에서 급하게 지갑을 뺄 때 손수건이 없어진 것이 확실했다.
그때 손수건을 흘려버린 것이다.
설이를 흘려버린 것이다.
도겸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이제 하늘 위로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보내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놓아주려 했는데...
그녀는 이미 스스로 도겸 곁을 떠난 것이었다.
‘설아... 미안해... 널 조금 더 일찍 보내줄 걸 그랬나 봐...
이렇게 혼자 스스로 떠나 버릴 거였으면... 그럴 거였으면 내 손으로 먼저 너를 보내줄 걸 그랬나 봐...
미안해... 너의 아픔을 조금 더 헤아려주지 못해서... 내 욕심만 챙겨서... 너를 곁에 두고 싶은 내 마음만 들여다봐서... 미안해...
지금이라도 그 사람과 함께 행복하길 빌게... 설아... 그리고... 사랑해...’
도겸은 하염없이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