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_설(雪)
#20. 여기 다시... 아오모리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깊은 잠에 빠졌던 설은 잠에서 깨어났다.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펜션 주인이 언제 놓고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된장국과 밥은 식어 있었다.
설은 식은 국을 몇 숟가락 뜬 후 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았다.
아오모리에 돌아왔지만, 너무나도 오고 싶어 했던 그 장소에 돌아왔지만 입맛은 여전히 없었다.
설은 알고 있었다.
지민이 와야만 했다.
그가 돌아온다면 그만 내 옆에 있다면 모든 것들이 안정을 찾아 멈춰버린 시간들이 다시 돌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설은 카디건을 꺼내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앙증맞은 정원도 눈 속에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온통 눈밭이라 시간에 비해 밖이 어둡지 않았다.
정원 앞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정원 가장자리에서 눈사람을 만들던 지민이 보였다.
큰 눈사람,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연신 웃어대는 지민이 보였고, 큰 눈사람은 자기가 하겠다며 칭얼거리던 설이 보였다.
설은 눈시울이 따가워지자 고개를 돌려 정원 가운데를 바라보았다. 바비큐가 한창이던 첫날의 지민이 보였다. 설에게 걸어와 담요를 덮어주던 따뜻한 눈빛의 지민이 보였다. 첫날의 지민은 그때부터 오로지 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시도 주위에 시선을 주지 않고 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민의 모습에 설의 마음이 아려왔다.
‘왜 진작 몰랐을까.. 왜 몰라봤을까...
하루라도 빨리 알아봤다면 우리 하루라는 시간을 더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단 일주일밖에 못할 꿈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 그를 더 많이 사랑해 주었을 텐데...
나는 왜 몰랐을까.’
쪼그려 앉은 채로 설은 울었고, 설의 옆에 조용히 펜션 주인이 다가왔다.
“일어나셨네요... 방에 따뜻한 된장국을 다시 가져다 놨어요... 들어가서 들어요... 여기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펜션 주인과 함께 설은 방으로 들어왔다.
펜션 주인이 설에게 숟가락을 주었다.
건네준 숟가락을 받으며 설이 말했다.
“안.. 가세요?”
“네.”
“네?”
“제가 나가면 안 먹을 거잖아요... 일 년 전보다 많이 야위었어요... 그동안 무슨 일을 겪은 거예요...”
설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거 먹을 때까지 안 나갈 거니까.. 어서 들어요... 된장국이 맛있게 됐어요.”
설은 된장국을 먹었다. 맛있었다.
일 년 전 여기 펜션에 와서 먹던 그 밥 그대로였다.
설은 먹기 시작했고 펜션 주인은 설이 밥을 다 먹고 나서야 밥상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설은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었다.
펜션 주인이 받아놓은 것이라고 설은 생각했다.
따뜻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일 년 전 지민과 함께 욕조에 들어와 부끄러워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생각이 나자 사무치도록 지민이 보고 싶어졌다.
설은 욕조 안에서 어린 고양이 마냥 몸을 웅크렸다.
분명 지민이 달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 촬영이 끝난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인터뷰며 화보며 밀린 자질구레한 일들을 끝내고 나면 바로 아오모리로 달려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기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 아침이 밝았다.
설은 밖으로 나가 펜션 앞 눈을 쓸기 시작했다.
눈을 쓸기 시작하니 이곳이 곧 내 집인 것처럼 느껴졌다. 설이 눈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펜션 주인이 뛰어왔다.
“작가님 날이 아직 많이 차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눈은 제가 치울게요.”
설이 들고 있는 빗자루를 펜션 주인이 뺏으려 하자 설이 말했다.
“눈은 제가 치우게 해 주세요... 꼭 집 같아... 좋아서 그래요.”
설의 말에 펜션 주인은 빗자루에서 손을 뗐다.
“아침 준비 중이니 그럼 조금만 쓸고 들어오세요.”
설은 그러겠다고 말한 후 다시 눈을 쓸기 시작했다.
눈을 쓸며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고, 며칠은 더 기다려야 지민이가 오겠구나... 우리 지민이 눈길에 넘어질라 어서어서 쓸어야지... 생각하며 설은 빗자루질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더 눈을 쓸고 난 후 설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펜션 주인이 밥상을 들고 설을 따라 들어왔다.
“아침부터 우동이에요?”
“아침저녁 안 가리고 좋아하시던 거 아니에요?”
펜션 주인의 말에 설이 웃었고 그런 설을 보며 펜션 주인도 웃었다.
“새우튀김도 있어요... 어서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맛있다. 이 맛 그리웠어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다 먹을 때까지 안 나가실 거죠?”
펜션 주인이 웃어 보였다.
이내 체념을 하고 설은 우동을 먹었다.
설이 우동을 먹는 동안 펜션 주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요?”
“아...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궁금해서요...”
“글 쓰는 사람이 뭐 했을까 봐요... 글 썼어요...”
“다 쓰셨어요?”
“네.”
“가지고 오셨어요?”
“네.”
“혹시나 원고가 있나 해서 두리번거렸어요...”
“가방 안에 있어요.”
“읽어봐도 돼요?”
“안돼요.”
“왜요?”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이 있어요.”
“지민 씨요?”
“네.”
“언제 온대요, 지민 씨는?”
“곧이요.”
“곧 언제요?”
“눈 그치면 올 거예요... 곧... 약속했어요... 나랑.”
“그렇군요... 지금 결항이라...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거예요.”
“네, 뉴스에서 봤어요.”
“오랜만에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겠군요... 기대돼요.”
“뭐가요?”
“예뻐요.”
“지민이가요?”
“두 분의 모습이 예뻐요...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아주 예뻐요.”
펜션 주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설이 말했다.
“지민이가 먼저 읽어야 해요... 우리 얘기거든요...
그래서 지민이에게 지분이 있어요... 다 읽고 나면 그다음으로 보여드릴게요.”
“네. 기대할게요.”
설이 우동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새우튀김까지 먹고 나자 그제야 펜션 주인은 방에서 나왔다.
뭔가 설을 먹여야 한다는 지령을 받은 사람처럼 펜션 주인은 행동했다.
펜션 주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김 도겸입니다.”
“네.”
“설이 밥 먹나요?”
“네. 지금 우동 한 그릇 다 비우셨어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고... 그리고 거기에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얼굴도 뵙지 못한 채 부탁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는 작가님이 다시 오셔서 기뻐요...
어쩌면 다시 오실 거라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작가님은 제가 잘 보살 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펜션 주인은 전화를 끊었다.
설이 히로사키 펜션에 머물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 도겸은 펜션 주인에게 설을 부탁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동안 설이 한국에서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힘들게 견뎌왔는지도 펜션 주인에게 모두 얘기해 주었다.
도겸의 말을 들으면서 펜션 주인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간의 사정을 다 들은 펜션 주인은 걱정하지 말라며 설이 펜션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이 잘 보살피겠노라 도겸에게 약속을 했다.
모두가 설의 걱정에 안절부절이었고 설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힘을 썼지만 설은 그치지 않는 눈에 그리고 끝도 없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