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막내딸의 생일이었다.
친구 셋을 초대했고,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여주고, 키즈카페에도 갔다.
누가 보면 흔한 생일파티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유난스러운 하루였다.
나는 원래 이런 걸 잘 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해주지 않는다는 쪽이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 생각이 항상 먼저였으니까.
사치스럽다는 생각.
다른 친구들과의 형평성에 대한 고민,
첫째 둘째 때도 안 했으니 그 수준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
무엇보다 부모님 생신 잔치 제대로 치른 지가 언제인가 싶은데 아이에게 이러는 것이 어딘가 맞지 않다는 것까지.(사실 이건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이런 건 나와는 맞지 않는 일’이라 여겼고,
나를 나름 '생각 있는 엄마’라고 여기며,
그 불편한 감정을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이번엔 일을 좀 크게 벌인 것이다.
단지 세 명을 초대한 것이지만, 체감상으로는 아주 큰 일.
이번엔 좀 다르게 하자고 작정하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
이 일은 생각보다 피곤했고, 신경 쓸 것도 많았으며,
돈도 시간도 많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참 좋아했고,
아이 친구들도 며칠 전부터 설레었다고 했으며,
친구 엄마들은 모두들 오랜만에 자유시간을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어땠을까?
앉아 쉬지도 못하고 분주했던 걸 생각하면, 파김치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투덜대다가도 어느새 뿌듯했고, 훌쩍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마음이 아릿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내가 불편해했던 '유난'의 기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들이는 것? 비용을 쓰는 것?
과하면 안 된다는 그 '과함'은 도대체 누가 정했을까?
나는 왜, 내 아이들에게조차 헌신을 아꼈을까?
‘헌신’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들어 사전을 찾아 본 적이 있다. 이제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헌신 : 마음과 몸을 다 바함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향한 헌신을 입 밖에 꺼내는 것이 지금도 어쩐지 자존심 상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사랑에도 자존심이 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자존심과는 상관없는 일인지가 보인다.
그런데 아이에 대한 사랑에 자존심이라니. 계산이라니.
처음부터 다 주면 기준이 높아져 나중에 힘들어질까 봐.
그만큼 못해줄 때 섭섭할까 봐.
혹은 아이가 당연하게 여길까 봐.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정도면 됐어’라는 선을 끊임없이 그어왔다.
그런데 부모가 전부를 다 주는 것과
그런 부작용들 사이에 정말 상관관계가 있을까?
아니, 오히려 받아봤으니
더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라는 건,
쓴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라
기꺼이 줄 때 충만해지는 거라는 걸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주겠다.'고 말하는 일이, 지금 이 순간도 어쩐지 거창하고 과한 것처럼 느껴지고, 망설여진다. 건방진 생각이다. 가진 것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면 다 주고도 모자라다고 생각할텐데, 나는 쏟아부을 것이 뭐 그리 많아서 이리도 아끼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100을 주는 엄미이고자 한다. 물론 그러고도 여전히 나는 게으를 것이고, 때때로 라면을 끓여주며 나의 편안함을 챙길 것이다. '너희들이 말을 안들어 힘들다.'며 투덜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옳고 저건 옳지 않다는 기준을 쥐고 사랑마저 계산하지는 않겠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역효과를 두려워하고, 아이들을 신뢰하지 못하며 그래서 기꺼이 내어 줄 수 있는 일에 선을 긋지 않을 것이다.
내 아이에게조차 내 마음을 다 주지 못한다면,
나는 누구에게 내 마음을 다 줄 수 있겠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