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진 물을 닦기보다 빈 잔을 들여다보는 리더의 모습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실패 앞에서 이 말을 참 자주 꺼냅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으니 빨리 단념하라는 ‘체념의 언어’이자,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쿨한 태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사 업무를 오래 하며 조직의 생리를 지켜보니, 이 말은 때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가장 편리한 ‘방어막’이 되기도 합니다. 실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되고, 그 실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결함은 ‘액땜’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버립니다. 결국 조직은 똑같은 물을, 똑같은 잔에 담으려다 다시 엎지르는 악순환을 반복하곤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위기의 현장을 지켜본 오십 대의 인사부장에게 이제 이 속담은 "물이 엎질러졌다는 건, 그동안 고여 있던 물을 비우고 그릇을 씻을 기회가 왔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사람들은 물이 쏟아지면 가장 먼저 걸레부터 찾습니다. 얼른 흔적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상 복구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엎질러진 물은 늘 ‘변화의 시작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전사 홍보 전략 기획안 최종 결재를 딱 하루 앞두고 대형 사고가 터진 적이 있습니다. 수개월간 팀 전체가 매달려온 최종 파일이 운영 실수로 영구 삭제된 것입니다. 백업도 없던 절망적인 상황, 담당 이 차장은 사색이 된 얼굴로 제 앞에 사직서를 내려놓았습니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관리 소홀입니다. 책임지고 물러나겠습니다.”
모두가 엎질러진 물을 보며 한탄할 때, 저는 시선을 옮겨 그의 사직서와 ‘비어버린 컵’을 보았습니다. 저는 사직서를 밀어놓으며 그에게 나직이 말했습니다. “이 차장,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니깐 말이야.. 그 사라진 기획안, 사실 작년이랑 너무 닮아 있지 않았나? 그래서.. 그렇다고.. 그냥, 어쩌면 우린 우리도 모르게 고여 있던 물만 다시 담으려 했던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야.” 이 차장이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자, 이제 컵은 완전히 비었어. 어차피 엎질러진 거, 이번엔 아예 다른 물을 담아보지 않겠나 싶어서? 김 차장이 정말 하고 싶었던 ‘진짜 전략’을 가져와 봐. 사흘 말미면 충분하겠지...”
그날부터 이 차장은 야전침대를 깔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사흘 뒤 나타난 그는 전년도 관행을 완전히 걷어낸 혁신적인 기획안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타깃부터 메시지까지 모든 것이 새로웠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고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탁해진 고인 물을 ‘안전하다’ 믿으며 마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고는 손실이 아니라 조직을 위한 ‘강제 리셋’이었습니다.
오십 대 인사부장에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체념의 언어가 아니라, 낡은 관성을 비워내라는 혁신의 신호입니다. 실패가 터졌을 때 "어떻게 원상복구 하느냐"에만 매몰되지 마십시오. 당신이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어 하는 그 사고의 흔적은, 사실 조직이 얼마나 낡은 물을 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입니다. 위대한 도약은 늘 완벽한 승리가 아니라 뼈아픈 실수 뒤에 찾아옵니다.
리더의 역할은 엎질러진 물을 탓하며 사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그릇을 함께 씻으며 “이제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은 끝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담으라는 축복의 서막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가장 강력한 반전의 법칙입니다.
당신은 지금 엎질러진 물 앞에서 걸레를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워진 그릇에 담을 새 물을 찾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