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가 아닌 배려, 나 스스로에게도 가져야 할 태도
공감의 시작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들 한다. 나 또한 그것이 원만한 인간관계의 기본이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과 모순의 대부분은 이 생각과의 충돌에서 기인했다. 대부분의 갈등이나 충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착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일종의 강박과 같이 '나는 늘 포용적이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또한 이는 단기간의 관계에서는 무리 없이 가능하였으나, 장기간 지속되는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를테면, 가끔 만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늘 즐겁고 큰 마찰이 생기지 않는 반면, 연인이나 자주 만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더욱 높은 빈도의 다툼을 겪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타인에게만이 아닌,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타인과의 관계 또한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어 그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닐까.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생각이나 행동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고자 했던 것은 '합리화'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등의 공식을 통해 다름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허나 자의식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편인 나에게 이 과정은 늘 순탄하지 않았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놓여진 모든 조각조각의 상황들을 납득할 수 있을 때에서야 비로소 개운해졌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이고 말뿐인 이해였다. 모든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나에게 이러한 모습은 늘상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안기기 일쑤였다.
'이해'란 사전적으로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사리를 분별하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즉,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것이 가능한 정도와 범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여기에서 오는 비관적인 생각에 매몰되었다. 이해하지 못해서 오는 충돌의 이유를 '내가 가진 마음의 그릇이 작아서'라고 판단하였고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더욱 까탈스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람들과의 관계형성에 자신감이 줄어들고 혼자가 더욱 편해져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늘어만 갔다. 특히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는 시간이 힘들었다. 나는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였는데, 다른 사람과 밥을 먹으면 거기에서 오는 행복을 오롯이 즐기기가 어려웠다. 또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혼자 폭식, 과식을 하는 빈도도 늘게 되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으로부터 찾아온 혼란은 어느새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이해까지 어렵도록 만들었고, 더 시간이 흘러서는 나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그 자체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망가진 내 모습이 마치 원래의 내 모습인 것 마냥 나는 잠식되어 갔다.
언제부턴가 나는 본디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늘 이타적이고 헌신적이며 타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했다.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 들여다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힐링이나 자존감과 같은 콘텐츠로 목소리를 내는 많은 작가들과 인플루언서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를 나에게 적용하기 위해 정작 어떻게 귀 기울이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이에 내가 탈출구로 선택했던 방법은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2~3달에 한 번 꼴로 나는 1~2일간의 연차를 내고 주말을 활용하여 3~4일 간 전국 각지로 떠났다. 여행지로 이동하여 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민 없이 먹고 커피 한 잔과 함께 그 도시의 관광지, 시장에 찾아갔다. 도시 내 규모가 큰 헬스장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뼈가 부서지도록 실컷 했다. 낯설고 새로운 공간에서, 익숙함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는 곳들에서 고민 없이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고 온전히 그 상황을 즐기려고 노력하였다.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그저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걸까?", "내가 나에게 기대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평소 나의 모습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내 욕구와 본능에 의존하고 그대로 행동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정하기 싫어했던, 애써 감추고자 했던 숨겨둔 모습들을 스스로에게 당당히 드러내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그제야 비로소 내면의 나와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를 갖추고 나니, 타인을 대하는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도구로 '이해'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해와 배려는 모두 나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허나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희생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이해'에는 나의 다름을 애써 감추거나 숨기고자 하는 경향이 '배려'보다 강한 측면이 있다. 우리가 남을 배려할 때에는 합리화라는 과정이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더 필요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개인 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러하였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무리해서 희생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장기적인 건강한 관계 형성이 가능하였고 상대방에 대한 포용력도 더 커질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오는 편안함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 또한 그 관계에 있어 안정감을 느끼게끔 하였다.
언제, 어디서부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많은 매체로부터 오는 다양한 정보들로 인해 본인도 못 느끼는 새에 '희생'을 강요받는 환경 속에 살고 있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관계에 있어 희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 건강한 희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거나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각자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희생해왔는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