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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계절, 멈춰 선 감정

여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조용한 선물

by 루체

뉴스에서는 연일 기상이변 소식을 전하며 예년과 다른 폭염, 집중 호우와 같은 날씨에 주의를 전한다.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했던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는 이번 여름이다.

문득, 봄의 미세먼지나 겨울의 맹추위와는 달리 여름의 날씨는 유독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예고 없이 몰려오는 폭염,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변해버리는 하늘. 다른 계절의 불편함은 예측 가능한 성격을 띠는 반면 여름은 "예측 불가능한 갑작스러움"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변덕스럽다"라고 부른다.


변덕이라는 표현 속에는 짜증이나 실망, 포기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름의 날씨는 마치 우리가 겪는 삶, 내 뜻대로는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 것만 같은 답답하고 지루한 세상과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를 결정하기엔 미래가 불확실하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엔 답답한 상태. 우리의 마음 깊은 곳 불안을 자극하기도 한다. 가끔 빗나가는 기상청의 예보를 참고 삼아, 내심 이번 주말엔 비가 오지 않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 기대는 쏟아지는 비 속에서, 내 마음에 있는 불안과 만나 분노라는 감정으로 번져간다. 그 분노는 단순히 날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내 기대를 저버렸다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도 같다. 여름은 이처럼 우리의 일상과 많이 닮아서, 그래서 더 짜증 나고 더 기억에 남는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쩌면 여름은, 이런 혼란 속에서 우리를 분노하고 짜증나게 만들며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겪고 또 다룰 기회를 던져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기치 않게 길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서 있는 순간, 무기력하게 실내에 갇혀 보내는 오후, 땀에 젖은 옷을 입고 묵묵히 하루를 견디는 감각. 이런 일상 속 고통스러운 정지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외면해 온 감정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감정의 속도를 늦추고, 삶의 결을 다시 느끼게 하는 시간. 그것이 여름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숨은 역할일지도 모른다.


보통 지루함은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감정은 감정적 회복과 창의성의 기반이 된다. 지루함을 느끼는 동안에는 마치 마음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선 부지런히 내면의 움직임과 감정의 성장이 일어나고 있다. 또, 그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감정이 천천히 익어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인내심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속도에 맞춰 공감할 수 있고, 삶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지루함을 마주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스마트폰 속 SNS의 알고리즘은 일상의 공백을 빠르게 채워주고, 언제 어디서든 즉각적인 자극을 제공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조차 화면을 들여다보고, 지하철 안에서는 끊임없이 스크롤을 내린다. 그 결과 우리는 지루함에 머무를 기회를 잃고, 인내심을 자극받을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단절된 감정의 훈련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배워야 할 감정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타인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 나의 감정을 다룰 수 있는 내공, 감정이 가라앉는 흐름을 받아들이는 힘은 모두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여름의 날씨는 그런 점에서 기회를 준다. 그 변덕은 단지 불쾌함이 아니라, 그동안 잠시 잊고 지냈던 지루함과 인내의 감정을 다시 일깨우는 은근한 자연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 화창한 날씨만을 기대하기보다는, 때로는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에 멈추어 서서 그 시간을 견뎌보는 일. 그 일 자체가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사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지루함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인간다워지기 위한 중요한 감정의 기반이다. 그리고 여름은, 그 지루함을 견딜 수밖에 없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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