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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서울에 사는 아들 부부는 어김없이 집을 찾는다. 기념일에도,
어버이날에도, 가족 모임이 있을 때도 빠짐이 없다.
바쁘고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도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그 마음이 고맙고 또 고맙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가까이 사는 딸과 사위까지 함께 모이면, 집 안은 금세 온기로 가득 찬다.
거실 한켠에 놓인 작은 식탁은 북적이는 가족들 덕에 좁지만, 불편한 내색을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서로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며 웃는다.
손수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고, 소소한
기를 나누는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면 늘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아들과 며느리가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싱크대 앞에 나란히 선다.
"애야, 놔두거라. 내가 하면 된다." 아내가 말려도 아들 부부는 설거지를 마다하지 않는다.
서로 눈짓하며 주고받는 그릇들, 바쁘게 움직이는 손놀림,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웃음소리.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겹고 흐뭇한지 모른다.
싱크대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아득한 어린 시절, 부엌은 오롯이 어머니의 차지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부엌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서면 복이 달아난다." 어른들의 말은 그 시절 우리 집안의 굳은 약속 같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일하셨다. 뜨거운 솥을 옮기고, 그 많은 김장을 하면서도 힘들다는 말씀 한번 않으셨다.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어 손등이 트고, 손톱 밑이 새까매져도, 불평 한마디 없던 어머니의 손등을 나는 기억한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랐고, 그게 세상의 이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세상도 사람도 변했다. 요즘은 남자가 가사를 맡는 집도 많다고 한다. 요리하고, 청소도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에 남자도 당연히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함께 삶을 꾸려가는 모습이 이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내 아들도 그렇다. 부엌일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작은 수고도 함께 감당한다.
그릇을 씻으며 며느리와 웃고, 쏟은 물까지 함께 닦는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당연한 풍경이 되었다.
나도 설거지나, 능숙하지 않아도 가끔은 요리에 서툰 손을 내밀어 보곤 한다.
예전 어머니가 했던 남자는 부엌에 들지 말라는 옛말은 우리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더욱이, 요즈음 같이 맞벌이하는 세상에는 더욱 타당하지 않다. 가정은, 누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역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수고를 기꺼이 함께하는 곳이어야 하는 믿음이 이제 내 신념이 되었다.
식탁에 남은 찻잔을 손에 들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심스레 다가가 설거지하는 두 사람 곁에 선다. "나도 좀 끼워주라."
아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아버지는 앉아 계세요. 저희가 다 할게요.“
나는 그 웃음에 밀려 다시 자리에 앉는다.
부엌 가득 울리는 물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또 생각한다.
가사는 누구의 몫이라는 경계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선線도
이제는 깨뜨릴 때가 되었다는 걸.
그리고, 우리 삶에 접시 몇 개쯤 깨뜨려 진들 어떤가.
서툰 손끝이 남기는 작은 흔적들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귀한 증거가 될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