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을 깎아준 사람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

by 글이로

연애를 8년 했다.

길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엔 수많은 고비도 있었다.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다시 싸우고…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면, 그냥 좋기만 해서 결혼한 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아,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구나, 하는 그 한순간.


나는 전남 광주에서 전투경찰로 전역 했다. 당시엔 군대 대신 경찰로 복무하던 제도가 있었다.

나는 그 시험에 합격해 전남 완도에 있는 해안초소에서 복무하게 됐다.

첫 발령지 완도군 금일도. 고향인 대구와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뚫려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때엔 88고속도로도 없었고 버스도 드물었다.

경상도와 호남이라 이용객이 많이 없기도 했다. 대구에서 버스로 광주, 광주에서 장흥,

그리고 배를 타야만 완도를 올 수 있었다.

새벽에 출발해도 오후나 되어야 도착할 수 있는 참으로 외진 섬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왔다. 면회를 온 것이다. 그 먼 길을 버스를 타고, 배를 타고 혼자서.

배에서 내리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손에는 과일 든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간식 봉다리를 들고,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아이처럼 들뜬 얼굴이었다.

사실은 많이 걱정되고, 피곤하고, 낯설고, 무서웠을 텐데 말이다.

면회실에서 나를 보자마자 웃던 그녀는 “왜 이렇게 얼굴이 탔어?” 하며 과일을 까주었다.

귤껍질이 예쁘게 벗겨지지 않아 어설프게 건네주던 그 손,

사실 나는 그때 이미 마음속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누가 저 먼 거리를 자기 일 다 제쳐두고 고된 몸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그게 사랑 아니면 뭘까. 그게 마음 아니면 뭘까.


면회를 마치고 그녀가 다시 돌아가는 길, 나는 선창가에 서서 끝까지 배웅했다.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나는 배를 바라 봤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앞으로 평생 지켜 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사랑이란 말보다 ‘고마움’이 먼저였던 것 같다. 그리고 고마움이 쌓여 사랑이 되었고,

결국 평생 함께하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연애 기간이 길면 “결혼이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길게 만난 만큼,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많이 싸운 만큼 오해도 풀 줄 알게 되었다. 마음 속 정도 그만큼 깊어 졌다.

결혼이란 결국,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가장 힘들던 시절, 그 먼 금일도까지 찾아와 귤을 깎아주던 사람.

그래서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아내에게 말한다.

“그때 면회 안 왔으면, 나 지금 혼자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내가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당신, 눈물 고였던 거 기억나?”

“에이, 눈에 먼지 들어갔던 거지.”

“됐고. 고맙게 생각해, 지금도.”


그래, 나는 지금도 그때를 고맙게 기억한다.

그리고 매일 같이 그 고마움 위에 사랑을 덧바르며 살아가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