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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 넷 중 둘째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막 시작되던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였고, 동생 둘은 각각 세 살, 네 살 아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하루 일과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아침에 눈뜨면 형과 한 판 붙고, 저녁엔 동생들과 또 한 판.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게임기가 있던 시대도 아니니, 심심하면 서로 싸우는 게 놀이였다.
형이 장독대 뒤에 몰래 숨겨둔 구슬을 훔쳐서 야바위에 몽땅 털려버리고, 모르는 척했던 기억도 난다.
결국 들 통 나서 어머니에게 옴팡지게 등짝스매싱을 당하고, '통시'에 앉아 엉엉 울었던 그날이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게 떠오른다.
싸움이 터질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런 말을 하셨다.
“이 노무 소상들! 느거들은 만나면 쌈질이고!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카이!”
그리고 꼭 덧붙이셨다. “참말로 언성스러브라”
그 시절엔 ‘소상들’은 우리 형제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만 알았지,
‘언성스럽다’는 말은 뜻이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냥 보기 싫다는 말이구나, 정도로만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를 알게 됐다.
‘언성스럽다’는 건 징글징글하다는 뜻이었다.
“어휴, 지지고 볶는 게 하루이틀이가. 보기만 해도 징 하다 징 해.”
어머니 말씀이 딱 그 뜻이었다.
그래도 그 ‘징글징글한’ 시절을 거쳐, 지금 우리는 누구보다도 끈끈한 형제가 되었다.
어릴 적엔 서로의 구슬 하나에도, 딱지 한 장에도 목숨 걸며 싸웠던 우리가,
지금은 숟가락 하나 더 얹어도 웃으며 밥 먹는 사이가 됐다.
때론 다투고, 오해하고, 미워했던 기억들이 세월을 지나면서 묘하게 정이되기도 한다.
형제란 그런 것 같다. 그 시절엔 몰랐던 그 말이, 이제는 가슴 깊이 새겨진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우리 형제들은 바람 많은 나무였다.
하지만 그 가지마다 살아 있는 잎이 돋고, 그 바람 덕분에 우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이제는 알게 됐다. 그 ‘언성스러운’ 날들이
결국, 우리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는 걸.
그 어려웠던 시절 남자 넷을 치다꺼리하시고, 날마다 쌈박 질 소리 들으며 살아내시느라
어머닌, 얼마나 속이 시렸을까.
그 마음을 이제야 헤아리는 못난 자식. 몇 해 전,
아버지 곁으로 떠나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엄마’의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엄마’가 그리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