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枝)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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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이로

오늘은 아주 농익은 봄날 같다. 굳게 닫힌 거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을 열자 겨우내 틀어 막혔던 공기가 단숨에 쏟아져 나가고 따뜻한 봄바람이 방 안을 휘저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이제 연두 빛 옷을 갈아입었고, 햇살은 창틀에 걸터앉아 "좋은 아침!" 하고 인사하는 것만 같았다. 베란다에 우두커니 서서 그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봄이 되면 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문득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떡갈잎 고무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어라, 저 녀석, 언제 저렇게 커졌지?” 이 집에 이사 올 때 들여온 녀석이다. 벌써 5년. 이제는, 사람 키를 훌쩍 넘겨 창문 틈을 비집고 나올 기세다. 덩치만 커진 게 아니라 잎사귀도 제법 넓어져, 내 얼굴보다 더 큼직한 녹색 부채를 펼쳐 놓은 듯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누렇게 변한 잎들이 보인다. 벌레가 갉아먹었나 싶었는데, 시간의 흔적 같이 보이기도 한다. 뭐랄까, 고무나무 인생의 스크래치 같은 느낌?


갑자기 가지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랍 깊숙이 처박아 뒀던 전지가위를 꺼냈다. 뻑뻑하지만 손에 착 감기는 게 나름 든든하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가지를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더 튼튼하게 자라라, 친구." 괜히 말을 걸어본다. 잎을 자르자 드러난 가지의 속살이 뽀얗다. 손끝에 끈 적한 수액이 묻어나는데, 마치 나무가 "아야, 살살 좀 해줘!"라고 하는 것 같다. 근데 묘하게 짠하면서도 뭉클했다. 이 녀석도 추위, 바람, 시간 다 견디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가지치기를 끝내고 나무를 보니, 마치 긴 머리 자르고 새 단장한 가녀린 소녀 뒷모습 같다. 바닥에 쌓인 낡은 잎들을 주워모았다, 아직 초록빛이 남은 잎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들고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그래도 이 잎들이 없었으면 고무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랄 수 있었을까?


문득 나 자신이 떠올랐다. 나도 고무나무랑 다를 게 없지 않나? 때로는 낡아버린 꿈, 때로는 상처 난 마음, 때로는 실패로 얼룩진 경험 같은 것들이 사실은 나를 여기까지 버티게 해준 건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보면 낡고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게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 아닐까?


묵은 잎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나니, 그 뒤에 숨어 있던 새 잎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연둣빛 잎들이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고마워, 덕분에 더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창문을 닫기 전, 나는 다시 한번 더 나무를 바라보았다. 가지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나무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바람이 나한테도 닿은 느낌이었다. "나도 이제 좀 정리할 때가 됐나 보다."


쓸데없는 욕심, 끝도 없는 후회, 버리지 못한 미련. 어디서부터 잘라야 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무도 사람도 오래된 가지를 잘라내야 더 싱그럽고 단단해지는 거니까.

봄은 그런 용기를 주는 계절이라서, 난 봄이 좋다. 아니, 더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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