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니체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인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책에 대한 리뷰를 해야 할지, 니체 철학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즉 나의 말을 다루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결정은 둘 다 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4부로 나눈 점에 대하여 크게 이유를 덧붙이진 못하겠다. 하지만 추론해 볼 때 1부는 다소 피상적인 인간에 대한 가르침, 2부는 조금은 고결하고 아이다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 3부는 과도기적 인간, 즉 덕이나 행복, 치유 등에 대해 사색하는 자에 대한 말, 4부는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초인과 인간상에 대한 마무리를 다룬다고 보았다.
니체의 그토록 유명한 말이 있다. 사람의 정신이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변화한다는 것 말이다. 정신의 짐을 낙타처럼 짊어지다가 사자처럼 포효하고 자유를 획득한다. 그러다가 모든 걸 망각하고 세계를 상실하고는 아이가 된다는 것이다. 사자에서 아이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일까, 아니면 신나는 일일까 하며 주변을 살피며 물어보게 된다.
정신적 변화에 대한 구절만큼이나 니체의 몰락하는 인간에 대한 구절들도 인상 깊다.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지, 덕, 체를 쌓던 고귀한 초인이 몰락했을 때 그 몰락을 긍정한다는 말 같았다. 몰락을 긍정한다는 건 몰락을 통해 공동선을 이룬다는 말일까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몰락이란 희생을 뜻하지 않나 싶다.
이쯤에서 한 부분을 택해 나의 말을 다루어 본다. < 일곱 개의 봉인 혹은 '그렇다'와 '아멘'의 노래>라는 챕터 중에,
일찍이 내가 대지라는 신들의 탁자 위에서 대지가 진동하고 무너지고 불의 흐름이 용솟음쳐 오를 만큼 신들과 주사위 놀이를 했더라면,
왜냐하면 신들의 탁자란 대지이고, 그 대지는 창조적인 새로운 말과 신들의 주사위 놀이로 벌벌 떨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나의 태몽은 얼음알갱이 같은 결정을 지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바다가 고향언덕이라면, 바다가 부른 아이에게 과연 신은 주사위놀이를 했을까. 한때 믿지 않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한마디(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를 다시금 되새겨본다.
나를 포함하여 니체는 신에 대한 회의를 가졌지만, 끝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니체에게 신은 외경의 대상이자 피하고 싶은 숙명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심연에 드리운 밧줄을 끊어내는 일은 두려우면서도 버릴 수 없을 만큼 끈질겼을 것이라서다.
만약에 니체가 덕을 선망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 몰락까지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으로 평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어떤 좌우명이 새겨졌을지 생각하면 난 아찔하다. 위대한 철학자로 아로새겨지지 않을 운명이라면 니체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을 것 같아서다.
운명, 숙명, 선악, 자유, 죽음, 이상, 덕망 같은 가치들은 인간을 만드는 재료이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어떠한 결정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니체라면, 분명 그 작업에 끊임이 없었을 거다. 고양된 정신을 가진 인물이라서이기도 하고 예를 들자면 마치 안토니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4면을 다 짓지 못할 만큼 완전하려는 것과 같달까.
그런 의미에서 만약 이러한 인간 결정체의 형성이 사람의 육욕이 아닌 신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다소 두렵지만 다시 한번 더 아인슈타인을 믿어보고 싶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그 말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혀를 내민 사진이 따뜻하다. 절망의 순간에도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나는 꽃처럼. 강아지풀이 쓰다듬고 싶은 만큼 코끝을 간질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