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생태공예 프로그램에 사용할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몇 가지 그림책을 살펴보다가 조수경 작가가 짓고, 한솔수북이 출판한 '내 꼬리'를 구입하였다.
표지의 아이는 아빠 옷을 입고 있다. 엉덩이에 꼬리가 삐죽 솟아나 있는데, 아이의 시선은 이 꼬리를 향해 있다. 내 꼬리라는 제목의 글자도 꼬리 끝에서 위쪽을 향해 뻗어있다.
우리의 고민과 열등감을 꼬리로 비유하여 어린이도 이해하기 쉽고, 어른과도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난 지호. 깜짝 놀랐다.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꼬리가 그날 밤에 생긴 것인지. 오래전부터 달려있던 것인지이야기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꼬리가 언제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호가 엉덩이에 달린 꼬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있다. 꼬리를 다른 사람이 봐도 개의치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없다. 지호가 아빠 옷으로 꼬리를 감추지만, 어떻게 지호 자신 몰래 감출 수 있겠는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감추고 싶은 뭔가를 완전하게 감출 수 없다는 말인데. 하늘과 땅이 알고 있다는 것은 실은 자신이 알고 있기에 자신 몰래 어디에도 감출 수없다는 말이지 않겠는가.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놀릴까 걱정이 되는 지호. 손으로 꼬리를 가리고 땅을 뚫어져라 보고 걷는데, 땅마저 놀리는 것 같다. 걱정을 할수록 꼬리가 자라 자기보다 커졌다. 계속 학교를 향해 가는 지호. 기특하다. 어른도 큰 걱정거리가 생긴다면 출근하기 쉽지 않은데.
교문 앞에서 짝꿍 민희와 딱 마주쳤다. 꼬리를 얼른 감췄지만 민희가 보고 말았다. 근데 민희의 얼굴에 수염이 달려 있지 않은가. 민희와 웃으며 손을 잡고 교실에 들어서는데. 어? 집게손이 달린 아이, 사슴뿔 아이, 코끼리 코 아이, 새부리 아이, 토끼 귀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깜짝 놀랐지만, 지호는 맘이 날아갈 것 같았다. 지호가 우리 각자는 다른 걱정거리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슴과 사자 이야기를 보면, 사슴이 볼품이 없다며 투덜거리던 다리가 맹수로부터 목숨을 구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듯. 지호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지호의 삶에 필요한 것일 수 있다.
지호의 이야기는 내 마음에 와닿는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친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은 다른 걱정을 불러오고 다른 걱정은 또 다른 걱정으로 불러오면서 나는 천일야화보다 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나 자신이고 엑스트라는 가족들인 비극으로 끝나는 상상 속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불안에 떨었다.
그즈음 친정에서였다. 고기를 구워 먹는다고 한 동생이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켰다. 가스레인지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길은 금방 잡혔지만 나는 매우 놀랐다. 내 속의 불안이 가스 불길이 주는 불안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그 후 오랫동안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못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보기만 해도 불길이 솟아오를 때처럼 불안해졌고, 이 불안은 내 안의 불안을 증폭시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걱정의 꼬리를 잘라낸 후, 다시 말하면 미래의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지호가 반 아이들을 보며 깨달았듯, 나는 자연을 통해 깨우쳤다.
봉무공원은 단산지라는 저수지를 끼고 있다. 단산지는 둑을 제외한 둘레길은 산허리를 깎아 만든 것인데, 전체가 맨발로도 걸을 수 있는 흙길이다. 십여 년 전 숲해설가로 봉무공원에 근무할 때. 가끔 단산지 둘레길을 혼자서 걸었다.
이 둘레길은 구불구불하다. 처음 단산지 둘레길을 걸었을 때였다. 끝자락이 가깝게 보여,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와~ 얼마 남지 않았네." 하는데 길이 구부러져 들어가 있었다.
구부러진 길을 가서 다시 굽이쳐 나왔을 때, 또 끝자락이 가깝게 느껴지지만, 다시 구부러진 길을 돌아 나와야 했다.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니. '얼마나 더 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산지 구불구불한 길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 힘겨운 일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또다시 힘겨운 일을 겪게 되는 우리. 힘겨운 삶의 막바지에 이른 걸 모르는 우리는 '얼마나 더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며 낙담하기도 한다.
이 둘레길을 걸으며, 내가 발견한 것이 있다. 바로 몇 그루 소나무다. 산에 사는 소나무가 그 소나무지. 별다른 특징이 있겠는가만. 내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가 있다.
산 쪽에 있는 소나무들 중 몇 그루는 둘레길 쪽으로 뻗은 뿌리가 잘려나간 채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둘레길을 만들 때 인부들이 잘라낸 것이 분명하다.
이 소나무들은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어디로 옮겨갈 수 없는 소나무들. 자신의 뿌리를 잘라낸 인간들이 걸어 다니는 길가에서 살고 있다.
이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 자신의 뿌리를 자른 사람들이 건강하겠다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소나무는 어떤 맘으로 바라볼까.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치자. 우리를 다치게 운전자가 매일 우리 집 앞을 지나다니며 운동하는 모습을 목격한다고 치자. 이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보면, 소나무의 입장이 이해될 것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소나무가 상처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불안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 소나무의 상처는 삶의 흔적일 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데, 단산지 둘레길에 있는 소나무와 비슷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금쪽상담소에 출연하는 사람들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은, 성공한 연예인들이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들이 고맙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 즉 나 같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일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금쪽상담소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프로그램이다. 그중에 기억이 남는 사람은 ㅇㅇㅇ 씨다. ㅇㅇㅇ 씨는 자라면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것 다 한 사람의 삶도 이혼을 세 번이나 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못해서 한이 맺힌 사람이다. 어릴 때 하고 싶은 것을 했더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ㅇㅇㅇ 씨의 경우를 보니 꼭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고,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상처는 대학을 포기하고 꿈을 포기한 것인데. 나는 이 일이 부끄러웠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대학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대학 원서도 못 내봤으니 그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만. 그보다 열등감에 휩싸여 버려서,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단산지 둘레길 뿌리가 잘려나간 부분이 드러나 있는 소나무들. 다른 나무에 비해 못나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있는데도 담담히 사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상처가 나를 못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린 거였다. 상처를 일부러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만. 애써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소나무가 알게 해 주었다.
ㅇㅇ복지관 숲체험 참여자 중에 매우 멋진 분이 있다. 소아마비 장애인인데 얼굴에는 항상 웃음과 당당함이 넘친다. 다리를 절지만. 개의치 않는 그분.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이분이 다리를 저는 것을 부끄러워 숨기려 하거나 삶의 장애물이라고 여긴다면 이렇게 멋지고 당당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꼬리를 가지고 산다. 우리의 삶이 다르듯 우리의 꼬리도 모두 다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수가 80억 명이라면 80억 종류의 꼬리가 있다. 80억 종류의 꼬리도 알고 보면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꼬리의 주인이 감추고 싶은 꼬리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꼬리다. 꼬리는 주인이 자신을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인을 다르게 대한다.
주인이 감추고 싶어 하면 꼬리는 천일야화를 쓰면서 긴긴밤을 지새우게 하는 열등감이나 걱정거리를 주인의 어깨 위에 얹어준다.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주인에겐 꼬리도 주인이 어떻게 살던 개의치 않고 저 혼자 알아서 살아간다.
지호에게 말해준다."지호야, 넌 정말 멋져!" "저의 어떤 면이 멋지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지호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꼬리가 달린 것을 알고 있지만. 네가 그걸 개의치 않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