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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마음속에 기둥이 생겨났다

이게 뭘까?

by 할수 최정희

백일백장 글쓰기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에서 대표님의 말씀을 들을 때였다. 내 안에 기둥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게 뭘까?

내 사춘기의 시작은 고등학생 1학년 때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담임 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는 벽이 있었다. 이 벽을 깨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조그만 수첩에 적어가면서 내가 한 행동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음이 찜찜할 때는 내가 한 말을 며칠씩 붙들고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내 마음이 왜 이렇지?' 생각하며 분석했다.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친구의 마음은 지금 어떨까?'를 생각해보고 내 마음과 비교하면서 분석했다.


어느 날, '아~, 이래서 내가 그런 말을 했구나.' '그 애가 그런 말을 해서 내 마음이 지금 이렇구나.' '친구가 이래서 그런 말을 했구나' '친구 마음은 이렇겠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지만, 마음의 벽은 쉽사리 깨지거나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돌아보는 일을 놓아버렸다. 생각하기를 멈춰버렸다.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면 서다. 개울물에 떨어져 떠내려가는 나뭇잎, 그게 나의 삶이었다. 나뭇잎이 흘러가다가 물길에 의해 잠시 강기슭에 닿는 순간이 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왜 여기까지 떠내려왔는지를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내가 떠내려오기 시작한 때는 고삼 때부터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대학 진학과 꿈을 포기하면 서다. 직장 다니면서 월급을 아버지께 드리면서부터다. 나를 포기하고 나서는 죽고 싶었다. 내가 없는 삶은 죽음이었다.


나뭇잎이 개울물에 떠내려가는 것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려있을 때, 즉 살아있을 땐 흔들릴 뿐 떠내려가지 않는다. 내가 삶의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온 것은 내가 내 삶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강물에 더 이상 떠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뗏목이라도 타고 스스로 저어 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나는 죽을 고통을 겪으면서 가족을 위해 희생했는데. 위로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혼자 삭였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내 마음을 엄마와 동생들에게 말하기로 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였다. 남동생이 먼 여행을 떠나갔다.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이었다. 얼마 전에 살을

뺐다고 좋아했는데. 조문객이 다 돌아간 후 장례식장 방에 가족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내 이야기를 했다. "대학을 포기하고 꿈을 내려놓고 월급을 아버지께 몽땅 드릴 때, 죽고 싶었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다고."


엄마가 "너무 힘들었겠다." 혹은 "네가 대학을 갔으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을 해주기 바랐다.


근데 엄마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네가 대학을 갔으면 동생들 공부 더 잘 시켰을 텐데. 내가 머리를 잘못 썼어." 엄마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앞가슴에 철판이 생겨났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는 데. 엄마의 말에는 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내보다 공부 더한 동생들 생각뿐이었다.


영화 기생충에 무계획이 계획이라던 송강호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맘이 가벼워지려고 말을 했는데. 도리어 앞가슴에 철판이 생기고 말았다. 이때도 그 순간의 내 마음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죽고 싶었다는 데도 동생들 생각만 하냐고. 너무 섭섭하다고. 소리쳤더라면 철판이 그날 사라졌을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앞가슴에 철판을 끼고 살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 치료를 한 덕분인지 철판이 말끔히 사라졌다.


우리는 '그 사람은 심지가 곧다' 혹은 '저 사람은 심지가 없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나이기를 포기한 나는 심지가 타버린 사람이었다. 촛불에 타고 남은 널브러진 촛농 사이, 거뭇거뭇 보이는 심지가 나였다.


마음은 형체가 없다고 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우리가 민감할 때 자신의 마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이때 우리는 주변 상황과 자신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자신의 마음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한 때 내 마음은 벽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한 때는 타버린 심지 모습이었다가 얼마 전 엔 철판으로 형체가 변했다. 백일백장 글쓰기 프로젝트 오리엔테이션 하기 전까지 내 마음이 어떤 형태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철판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내 마음의 모습에 대해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앞가슴에 색깔도 없고 유리처럼 투명하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은 새로 생겨난 기둥. 이것이 무엇일까. 이것이 왜 생겼을까. 생각해본다.


그냥 한 개의 기둥이다. 백일백장 글쓰기를 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 기둥. 이 기둥이 있는 한 글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둥이 흔들리면 글쓰기도 흔들릴 것이고 이 기둥이 무너지면 글쓰기도 무너질 것이다. 이 기둥이 흔들려도 무너져도 글쓰기는 할 수 있다. 그렇다. 기둥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속의 기둥이 백일 내내 이 모습을 유지해 주기 바라지만. 그대로 있지 않을 것이다. 백일백장 글쓰기를 하는 동안 내 마음의 형체가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해 보련다. 사실 기둥이 사라져도 마음만 있으면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의 마지막 몸부림. 한 단어면 족하다. 그 단어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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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라고 발음을 해보면 '끝'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소리를 내든 소리를 내지 않든 지금 '끝'이라고 발음해보라. 혀가 입천장에 붙으면서 숨이 멈춰진다. 이게 끝인 것이다. 끝이란 한 단어를 통해 작가가 글을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을, 그 사람이 글쓰기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기둥이 사라졌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기둥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중이니까. 이럴 때도 글을 쓸 수 있다. 살아있고 뭐라도 쓰고 싶다면 한 단어라도 써야 한다. 바로 그 단어는 중(ing).


우리는 중(ing)에 있다. 생각하는 중. 에너지를 충전 중. 무엇을 기다리는 중. 눈물을 흘리는 중. 항상 우리는 그 무엇을 하는 중이었다.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던 나도 여러분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늘 중(ing)이었듯 앞으로도 중(ing) 일 우리. 지금은 백일백장 글쓰기 중입니다. 나도 여러분도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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