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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2022년 8월 5일

별것 아니었다.

by 할수 최정희

2022년 8월 5일.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니다.

빨간 민소매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간 날일 뿐.

별 날이 아니다.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난생처음 민소매 옷을 입고 나갔다. 투썸'이라고 적혀있다.

누구를 만났는지 왜 투썸플레이스에 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소매가 달리지 않은 이 빨간 옷을 몇 년 전에 샀다. 여름이 되면 입고 나가야지 하며 여름마다 입어보았지만.

정작 나갈 땐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나가려니 내가 내게 민망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입고 나가야지 벼르다가 그날에야 입고 나간 것이다. 그날 만난 사람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분명하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불편한 자리에 구태여 소매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고 나가 불편함을 더 보태지 않았을 것이다.


슬리브리스 옷이라고 해도 어깨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앞이 훤히 파인 것도 아닌데. 요즘 세상에 그것을 입고 나가는데 몇 년이나 망설였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을 일이다. 사람들이 웃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 게 나니까. 이 옷을 입을까 말까 몇 년이나 주저했지만, 그날 큰맘 먹고 이 옷을 입고 나간 이유가 있다.


내가 소매 없는 옷을 입고 나가는 것만 몇 년씩 망설였겠는가. 무슨 일을 하게 될 때마다 할까 말까 주저주저하다가 주저앉은 일들이 정말 많다. 그러니 이 옷이라도 입고 나가면서 나를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도전해 본 적이 없어서 소소한 것이라도 해보려는 것이었다.


소소한 것이 쌓여서 삶이 된다.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도전이라 할 수 있겠나만. 내겐 도전이다. 안 하던 일을 하려면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날 민소매 옷을 입고 외출한 이유는 이 일이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는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유입된 유교적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지하철을 타고 투썸플레이스에 갔는데. 민소매 옷을 입고 나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매가 달리지 않은 옷을 입고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별 것 아니었다. 내친김에, 며칠 뒤에도 입고 나갔다. 어떤 사람이 빨간 민소매 옷이 내게 어울린다고 했다. 자신은 젊을 때 입고 다녔는데 이젠 안 입는다고 하면서. 나는 말했다. 민소매 옷을 입고 나온 것이 딱 두 번째라고. 별것 아니었다.


별것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생전 처음 해본 일, 큰맘 먹고 한 일이 별것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겐 소소한 일상일 테지만. 민소매 옷을 입고 외출하는 일이 내게는 별것이었다. 내 속의 민망함을 떨쳐내고 내 몸이 생전 처음으로 한 일이기 때문이다. 별것과 별것 아닌 것은 한 끗 차이다. 세상 모두가 별것 아니라고 해도 내가 별것이라고 생각하면 별것이다.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외출한 것을 내가 별것으로 여기듯 말이다.


우리는 별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길 땐 괴롭지만 별것 아닌 것을 별것으로 만들게 되면 웃는다. 사는 것, 별것 아니었다. 민소매 옷 입은 것을 별것으로 만드는 거였다. 별것 하나 생기니까 생기가 돌았다. 별 것을 만드는 일, 별것 아니었다. 행복이란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깨어 일어나서 글 쓰는 소소한 일상을 별것으로 만들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라고.

그렇다, 숨 쉬는 일이 바로 우리의 별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당신은 당신의 별것이기에 충분합니다.

나도 나의 별것이기에 충분합니다.


소소한 것이 별것이 되는 삶

행복합니다.


천상병 시인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 세상 소풍 아름다웠노라."는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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