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5] 엄마와 재봉틀

그리고 옷 이야기

by 할수 최정희

다섯 살 즈음 추석을 앞둔 때였다. 옷감 장수가 왔다.


엄마가 엄마 옷을 만든다고 옷감을 샀다. 할머니가 돈도 없는데 왜 옷감을 샀느냐며 엄마를 나무랐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이웃마을로 옷감을 반품하러 갔다. "내가 바느질해서 번 돈으로 산 건데."라고 혼잣말을 하는 엄마가 안 돼 보였다.


엄마는 재봉틀로 옷을 만들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했다. 이웃사람들의 옷을 수선해 주기도 했다.


유치원 소풍 때는 엄마가 만든 어깨끈이 달린 체크무늬 주름치마를 입고 갔다.


할머니 환갑잔치 사진을 보면 네다섯 살쯤 돼 보이는 내가 민소매 티어드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사진은 흑백사진이지만. 그 옷은 연한 분홍색이었다.


육이오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때 시골에서 분홍색 티어드 원피스를 어떻게 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국민학교 때는 엄마가 하얀 바탕에 네이비 색 동그란 무늬 가 있는 천으로 민소매 옷을 만들어 주었다.


4학년 때에는 모자가 달린 나일론 점퍼가 유행이었다. 요즘처럼 오리털이나 거위털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얇은 스펀지가 든 점퍼였다.


여자 애들은 빨간색, 남자애들은 네이비 색 나일론 점퍼를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입고 다녔다. 물론 나도 입고 다녔는데 이 옷은 금방 색이 바래져 허옇게 변했다.


중고등학교 때 교복은 외출복 겸용이었다.


20대 공무원 시절에는 퇴근 후 부리나케 큰장이라 불리는 서문시장에 갔다. 서문시장은 도매시장이라 일찍 문을 닫기 때문이다.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다 맘에 드는 옷감을 샀다.


양장점에 있는 샘플 조각보다 직접 큰 천을 보는 것이 마음에 드는 옷감을 더 잘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양장점에서 옷감을 선택해서 옷을 맞추는 것보다 훨씬 싸기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산 옷감을 들고 동성로에 있는 양장점에 가서 투피스를 맞췄다. 당시 동성로는 대구에서 제일 번화가로 양장점이 줄지어 있었다.


결혼할 때 즈음 동성로에 고급 기성복 가게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 난 동성로에서 기성복을 샀고 남편은 중앙로에 있는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췄다.


그 후 양장점이 사라져 갔다. 옛날에 가장 번화가였던

동성로엔 SPA 브랜드 옷 매장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롯데백화점이 입점해있는 KTX 대구역 앞으로 뻗어있는 중앙로는 구제 옷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얼마 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샀다. 마우스 클릭만 하면 옷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산 옷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반품까지 집에서 할 수 있다.


처음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입할 때. 너무 힘들었다. 클릭 몇 번 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 혹은 누군가의 조작으로 인해서 내 통장의 돈이 빠져나갈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처음엔 자녀들에게 인터넷 쇼핑몰 물건을 구입해달고 부탁했다. 서로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직접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이 불안과 맞서야 했다.


이불안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스템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나날이 변해가는 세상의 낯선 시스템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 취약 계층에 속하는 나.


스스로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아직도 자녀들에게 인터넷 쇼핑몰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하고 있을 것이다.


뒷방에서 사는 나를 세상에 꺼내 준 것은 자유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생태공예힐링핼퍼 1호/ 할수




























"역사를 공부하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과,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눈이 생겨요. 저는 그걸 찾기 위해 역사를 공부해요."*라고 유시민이 말했는데. 나는 '맞네.'라고 하는 내 마음을 따라가다가, 나의 역사를 읽고 해석하면서 나와 엄마와 할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 엄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서 내 아침과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새벽에 십리를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가야 했으나. 나는 나를 위해 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날마다 나를 시간 맞춰서 보내려고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엄마는 우물물을 길어 교복과 칼라를 빨아 풀 먹여 말리고. 연탄불 위에서 다리미를 데워 빳빳하게 다림질까지 해주었다.


엄마라고 다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세탁기가 있었지만 아이가 중학교 입학하면 교복을 스스로 빨게 했다. 빨래도 해봐야 한다면서. 사랑이 없었다면 대충 해줬을 것인데.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나의 언어와 엄마의 언어가 달랐기에 내가 알 수 없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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