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연인은 백날백장 글쓰기 사명서[100-1]에서 밝혔듯 그림책이다. 두 번째 연인 그림책을 만난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는데. 첫눈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근데 첫 연인 야생식물들과의 첫 만남을 언제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다.
엄마나 혹은 아버지나 할머니가 갓난아기인 나를 마당으로 처음 안고 나왔을 때, 명암만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갓난아기 내가 첫 연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 년이 지나도 시력이 겨우 0.2 정도이고 어른처럼 보려면 5살 정도는 되어야 한다니까. 나의 첫 연인 야생 식물들. 서서히 내 속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마당 바닥에 붙어있던 쇠비름의 줄기. 붉어서 쳐다보고 오동통해서 쳐다보았다. 꺾어도 보고 구부려도 보았다. 다른 풀들과 달리 오동통한 잎. 만져보고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좁쌀 같은 노란 꽃에도 자꾸 눈길이 갔다. 꽃이 작아도 너무나 작아 놀랐던 것이다.
쇠비름 꽃이 지고 나면 씨앗 통이 볼록 솟아오른다. 볼록 솟아오른 씨앗 통. 작아도 너무 작은데 윗부분을 잡아당기면 뚜껑처럼 열리고 그 속에는 까만 씨앗들이 소복 들어있다.
손가락에 묻은 쇠비름 씨앗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쇠비름의 씨앗은 까만 점이었다.
세상에, 작디작은 쇠비름 꽃은 씨앗에 비교하니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어느 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올라간 산에서 할미꽃을 만났다. 하얗고 보송한 털옷을 입은 할미꽃 이파리와 할미꽃. 우단 같은 꽃잎의 자주색이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세상에 이보다 예쁜 색깔이 있을까.
해마다 봄이 오면 산에 올라갔다. 제일 먼저 할미꽃을 찾았다. 보송송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할미꽃 꽃봉오리를 열고 꽃잎 안쪽의 자주빛을 바라보았다.
할미꽃의 형태가 아니라 매혹적인 자주빛깔과 솜털을 비추는 햇살을 혀로 아이스크림 핥듯 눈으로 핥았다.
그 산에서 진달래도 만났고 버들강아지도 만났다. 진달래꽃의 야들야들한 분홍 꽃잎에 마음이 흔들리고 햇살에 빛나는 버들강아지의 솜털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꽃받침 위에 빽빽하게 박힌 국화 꽃잎들. 코스모스의 혀꽃이라 불리는 큰 꽃잎과 중심에 촘촘하게 모여 핀 작은 꽃들이 눈에 도장처럼 찍혔다.
수목원에서 자연지도자로 봉사할 때 동료들과 산으로 답사를 갔다. 어느 날 질경이를 만났다. "이 질경이 좀 보세요 넘 예쁘요."라고 소리쳤다.
앞서가던 동료 중에 누군가가 질경이 어디가 예쁘냐며 나더러 아무거나 다 예쁘다 한다고 했다.
안 예쁜 식물은 없다. 식물은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날 내가 만난 질경이는 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림 같았다. 잎과 줄기의 유려한 곡선과 위로 쭉 뻗은 꽃대의 직선이 어우러져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질경이를 아름답다고 한 것은 질경이의 꽃도 아니고 빛깔도 아니고 질경이의 몸이 만들어낸 선이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 사람이 "뭐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래?"라고 한다면. 머쓱해지지 않겠는가.
우리 중 누가 그런 말을 사람에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다시 보여주겠는가. 식물이라고 다르겠는가.
나의 첫 연인, 식물들은 내가 그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며 가슴 설레는 줄 아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질경이를 비롯한 식물들이 어떻게 저만의 아름다움을 내 앞에 펼쳐놓겠는가.
내 눈을 통과해 들어와 가슴에서 수묵화처럼 다시 피어나는 야생식물들 나의 첫 연인. 아름다워서 지금도 가슴이 에인다.
우리 각자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나만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그 사람에게 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 그런 사람을 못 만났다면.
할미꽃 꽃잎을 펼치듯 나 자신을 펼쳐서 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내가 나의 아름다움을 감탄해주자.
내가 나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이 되어주다 보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성격이나 성품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고 사귄다는 유유상종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우리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애써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나 스스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면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알아서 몰려올 테니까.
생태공예힐링핼퍼 1호/ 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