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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Mar 24. 2024

[100-20] 바지를 빨리 말리는 법

네 살짜리 아이의 아이디어

"엄마, 목이 말라요. 물 주세요."

딸이 말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물병을 기울여 한 컵 가득 물을 따라 부었다.  딸은 내가 물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컵을 딸에게 내밀었다. 딸이 급히 물컵을 받아 들었다. 물컵이 흔들렸다. 출렁 물이 흘러내렸다. 물을 다 마신 딸이 말했다. 


"엄마, 바지가 젖었어." 

"어, 바지가 젖었다고? 어디  보자." 

딸이 손가락으로 다리를 가리켰다. 바지 무릎 부분이 촉촉 젖어있었다. 딱 100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이 정도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마를 거야."

그러고 나서 겨우 1~2분이 지났을 때였다. 딸이 다가와서 말했다.


 "엄마, 바지 다 말랐어."  

"뭐? 벌써 바지가 다 말랐다고? 함 보자." 

딸이 자랑스럽게 다리를 쑥 내밀었다. 이럴 수가! 정말 바지가 다 말라있었다. 

"이런 생각 어떻게 한 거야? 아이디어 너무 좋아."

라고 말하며  나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딸도 나를 따라 깔깔 웃었다.


아무리 백 원짜리 동전만큼 젖었다 해도 젖은 바지가 이렇게도 빨리 마를 수가 있나? 도대체 어떻게 된 연유지? 어른이라면 다리미로 다림질을 하거나 헤어 드라이기로 말릴 수 있겠지만.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또 어른이라 해도 다리미를 꺼내고 열을 가하고 말리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헤어드라이기를 사용한다면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들릴 것인데. 어른이라도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빨리 바지를 말릴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네 살짜리 아이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 젖은 바지를 이토록 빨리 말릴 수 있었을까? 딸입고 있던 바지 무릎 부분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백 원짜리 동전보다 좀 더 크게. 딸이 젖은 바지를 말리려고 가위로 오려낸 것이다.  바지에 젖은 곳이 없으니, 딸의 말대로 바지가 마른 것은 틀림없다. 


이 일은 딸이 네 살 즘 있었던 실화다. 그때 딸이 입고 있던 바지는 낡은 내복하의였다. 그래서 내가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아마도 비싼 외출복이거나 새 바지였다면 가위로 옷을 자르면 안 된다고 일장 연설을 했을 것이다. 아까워서. 


내가 딸에게 "이 정도는 괜찮다.'라고 한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이 정도는 괜찮다고 했지만, 딸에게는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가위로 젖은 부분을 오랴냈다. 옷이 젖었을 때 각자에게 허용되는 '옷이 젖은  정도'가 달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이 정도는 참고 견딜 만 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자신에게 했다면 상관이 없다. 기준을 내린 사람이 자신이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했다면 그 사람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그 사람의 기준은 나와 다를 테니까. 내가 괜찮다고 여기는 정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은 '이 정도라고? 난 미치겠어." 혹은  "이 정도까지 어떻게 참고 살아."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딸에게 |"이 정도는 괜찮아."가 아니라 , " 이렇게 젖었는데 입고 있고 있을 수 있겠어?"라고 물어봐야 했다. 딸이 "응."이라고 대답했다면 딸이 가위로 옷을 자르지 않았을 것 같다. 자신이 젖은 옷을 입고 있겠다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딸이 가위로 옷을 자른 것은 내가 괜찮다고 했지만 딸에겐 괜찮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준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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