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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Mar 15. 2024

[100-11]이게 유아그림책이라고?

벽/ 정진호 글 그림

글밥이 적은 그림책을 좋아해. 그림책을 고르다가 글밥이 많으면 내려놔. 그림책이니까. 그림책에 글밥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어. 그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재밌게 읽기엔 좀 부족한 것 같아서야. 그림책은  글밥이 몇 안 될 때 더 마음에 와닿아.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어서야. 


도서관에서 정진호의 그림책 '벽'을 펴 들자마자 맘에 들었어. 이 책의 그림이 단순하고 글밥도 얼마 되지 않아서지. 무엇보다 벽이란 제목이 좋았어. 그런데 이게 유아책으로 분류가 돼있어. 벽은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순한 의미일 수도 있지만, 보다 깊은 의미도 포함 돼있는데 말이야. 이 그림책 벽처럼 이중적 의미가 담긴 그림책이 어른들이 읽기에 좋아. 이 책은 2016년 황금도깨비상을 받았다고 해. 내 그림책 고르는 안목이 점점 생기는 것 같지 않니?


그림책을 열면 긴 벽이 있어. 한 사람이 벽을 따라 걸어가고 있어. 저 쪽에 창이 하나 있고. 다음 페이지엔 그 사람이 창으로 안을 들여다봐. 근데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는 거야. 이게 뭔 말이야?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깥을 보고 있다니. 벽에 더 다가갔더니 더 멀어졌대. 안으로 들어갔는데 밖으로 나와버렸대. 볼록한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목한 벽이었어.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왼쪽으로 가고 있더래. 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창이 큰 것일까 하고. 벽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바깥을 내다보고 있고 다가갔는데 더 멀어지고 오목한 줄 알았는데 볼록하고  그래서  바뀌는 건 벽이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라고 말이야. 


벽이 보여 안인 줄 알았는데 사실 바깥에 있었을 수도 있어.  바깥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안쪽에 있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잖아.  숟가락을 떠올려봐. 앞면은 오목하지만 뒷면은 볼록하잖아. 그러니까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오목하게 혹은 볼록하게 보이는 거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시선으로 벽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벽이 달라 보이는 거지. 벽이 달라진 것이 아니야. 


우리가 산다는 것은 메비우스의 띠를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앞도 뒤도 시작도 끝도 위도 아래도 없는 길을 말이야.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벽이 세워져 있기도 하지만, 창이 있어 틈새로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길을 말이야.  어쩌면 뛰어넘을 수 없는 가장 높은 장벽은 나 자신이 아닐까? 벽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 창이 있을 텐데. 창이 없다고 단정 짓고 낙심해 주저앉는 내가 말이야. 오늘 넌 어떤 벽을 넘고 있니? 이 글은 지금 벽을 넘고 있는 나와 너에게 쓰는 편지야. 난 나란 장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야.  벽을 넘다가 어느 곳에서 너를 마주치면 좋겠어. '너도 벽을 넘고 있구나.'란 눈빛을 우리 서로 교환할 수 있다면 좋겠어. 넌 어디쯤 있는 거니? 나를 넘어가다가 너를 넘고 있는 너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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