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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Apr 05. 2024

[100-32] 바람이 불 때, 나는

폴 발레리의 시를 읽다가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한다. 뭉클 가슴이 시리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고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란 김수영의 시 풀이 문득 생각난다. 아마 김수영의 시 풀에도 바람이란 말이 있어서 일 것이다. 김수영은 풀이 누웠지만,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한다.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 나는 무얼 했나 돌아본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땐 땅굴로 숨어들었고,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땐 동굴 속에 들어가 피했다. 좀 약한 바람이 불 땐 바위 뒤에서 피했다. 그리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기다렸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없었다. 어느 날은 너무 뜨겁고 어느 날은 습하고 어느 날은 건조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동굴 속에 땅굴 속에 바위 뒤에서 살았다. 다정한 바람이 부는 날에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폭풍우가 무서워서.  


소라게는 몸집이 자라면, 더 큰 소라껍데기로 바꿔야 한다.  바꾸지 않으면 몸이 끼여서 살아갈 수 없다. 소라게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소라껍데기를 벗어 버려야 한다. 이때마다 소라게는 맨살을 드러내야 한다. 큰 소라껍데기를 찾아다닐 때 소라게 마음은 당연 큰 소라껍데기를 빨리 찾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소라껍데기를 찾았을 때, 소라게는 망설이지 않고 소라껍데기를 갈아입을까?  아니면 천적에게 잡아먹힐까 두려워 입고 있던 소라껍데기를 벗는 것을 주저할까?


내가 소라게라면 큰 소라껍데기 앞에서 오랫동안 벗을까 말까 망설일 것이다. 맨살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서 말이다. 잠시 맨살을 드러내다가 죽거나 소라껍데기 속에 갇혀 죽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그러나 소라껍데기를 벗다가 천적에게 잡아 먹힐 수 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다시 소라껍데기를 입고  살아갈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껍질을 벗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지. 하지만 나란 소라게는 소라껍데기를 벗을까 말까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아파서 어쩔 수 없을 때 껍데기를 벗곤 했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처럼

바람이 불어올 때,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야겠다. 바람보다 먼저 웃어야겠다. 김수영처럼


하지만 폴 발레리에겐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불었고 김수영에겐 김수영만의 바람이 불었지. 내겐 나의 바람이 불고 있어. 난 나의 바람 앞에서 기꺼이 맨살을 드러내는 소라게로 살아갈 거야. 그리곤 바람보다 먼저 웃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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