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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May 30. 2022

내가 잘 아는 그녀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다

영화한 편을 보고. 내가 잘 아는 그녀가 사흘 동안 울었다.


어떻게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흘 동안이나 운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도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흘 동안이나 우는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내가 잘 아는 그녀를 사흘 동안 울린 영화는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영화가 언론에 소개될 때부터 그녀는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었으나, 여성으로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삶과도 맞닿아있는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가 그녀는 궁금했다.


잘 아는 그녀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 사람들은 버지니아 울프, 허난설헌, 그리고 윤심덕, 나혜석 같은 구한말 신여성들이다.


들은 여성이란 껍질을 스스로 깨부수고 나왔다. 들은 인간으로서의 욕구,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들이 안락한 생활을 추구했다면 여성인 그들을 억압하는 사회 규범과 사람들의 눈총에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용감하게 맞선 이유는 자신이 인간이란 확실한 자각 때문다.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데. 여성에겐 이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82년생 김지영'이 사는 시대와 내가 잘 아는 그녀가 태어나고 살아온  시대는 서로 큰 차이가 있지만. 그녀들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똑같은 문제로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2019년 11월 26일 저녁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 갔다. 영화'82년생 김지영'이 시작되고 나서 그녀는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영화 속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때. 그녀는 무의식이란 지하방에 탑재되어 있는 초강력 전자석에 끌려가 덜컥 붙어버렸다.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면서 꿈까지 포기하고 살아온, 내가 잘 아는 그녀는 '82년생 김지영'의 감정에 공감했다.


그녀는 영화를 보는 내내  통곡하고 싶었다. 그녀는 끝내 큰소리로 통곡하지 못했다. 다른 관람객들에게 피해가 될까 염려한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사람의 눈총이 무섭기도 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공원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늦은 시각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큰 소리로 통곡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상과 달리 공원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녀는 공원에서도 통곡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통곡을 하지 못했다. 이웃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서였고 큰 소리로 우는 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가 잘 아는 그녀가 설거지를 할 때였다. 갑자기 소리 없는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다음 날 외출했다가 빨간 신호등에 걸린 사이 남편이 보낸 그냥 그런 내용의 카톡을 읽는 데 또 눈물이 쏟아졌다.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는데 심장이 터질 듯 흔들렸다. 어깨가 들썩여지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목구멍에 걸려 내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울음. 예전에 밤마다 그녀가 울던 울음이었다.


오늘 그녀를 괴롭게 한 일이 없었는데. 오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때 그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그녀는 사흘 동안 내내 눈물을 찔금 찔금 흘리기도 하고 때론 격렬하게 어깨를 들썩이는, 그러나 소리 없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침이었다. 이불속에서 잠이 깨어 눈을 뜨는 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놀랐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의식이 들자마자 곧바로 눈을 뜨는데, 눈을 다 뜨기도 전에 눈물이 흘러내리다니.


내가 잘 아는 그녀는 알아차렸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무의식의 지하실에 탑재되어 있는 초강력 전자석에 자신이 감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내가 잘 아는 그녀는 무의식이란 지하방에 탑재되어 있는 초강력 전자석의 힘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 초강력 전자석은 그녀가 힘으로 대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달걀로 바위 치기란 말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누군가가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데 달걀로 바위 쳐서 바위를 닳아 없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말한다. 내가 잘 아는 그녀에겐 바위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던질 달걀과 시간이 없다고.


내가 잘 아는 그녀가 울기만 하면 된다고. 내가 잘 아는 그녀의 눈물에 잠긴 초강력 전자석은 방전될 것이고.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일 따윈 안 해도 된다고.


내가 잘 아는 그녀가 다른 사람 때문에 울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핑계다. 내가 잘 아는 그녀의 울음 스위치가 제대로 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그녀의 어딘가에 내장되어있을 울음 스위치를 켜지게 할 그것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아는 그녀가 그것을 만날 때까지, 울음보가 터질 때까지, 눈물이 다 흘러낼 때까지, 나는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내가 잘 아는 그녀는 바로  나다. 내가 영화 한 편을 보고 사흘 동안 운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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