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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Jun 26. 2022

마음을 잘못 쓴 거야.

소풍

코로나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2020년 초  남동생이 심장마비로 먼 여행을 떠나갔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살을 뺐다고 좋아했는데. 남동생 장례식이 끝난 후 한동안 외출하기 싫었다. 자주 만나며 살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죄다 남동생으로 보였다. 마주쳐 지나가면서 살펴보면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데.


내가 얼마 전에 브런치에 올린 '내가 잘 아는 그녀'를 읽은 사람은 알 것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의 김지영이 바로 나란 걸. 고 삼 때 진학과 꿈을 포기한  이유는 편찮으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우리 가족(할머니와 엄마와 나와 다섯 동생)이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고 오래 사시도록. 나는 봉급을 아버지께 갖다 드리곤 나는 절망했다.


내 앞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날마다 죽고  싶었다.   마음을 지금껏  가족에게 감추고 살고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나를 포기하면서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아직도 그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했는데. 가족 중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엄마와  동생들에게 내가 죽을 만큼 괴로웠다는 이 사실을 말하기로 맘먹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내가 이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가족, 아니 엄마에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가족들이 함께 모일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아 초조해졌다.


늦은 저녁 조문객들이 다 돌아갔다. 장례식장 방안에 가족들이 모였다. 떠나간 남동생 이야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꿈을 포기하고 월급을 몽땅 편찮으신 아버지께 갖다 드릴 때 절망했다고. 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다고. 꿈을 포기하고 사는 것 너무 힘들었다고.  죽고 싶었다고. 예순 후반의 나이인 지금까지 그 그늘 속에서 산다고.


여동생이 말했다. "언니, 옛날 일을 가지고 이제 와서 왜 그래."라고 했다. 나는 네겐 옛 일. 지나간 일인지 몰라도 내게는 현실이라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는데 현실이 아니면 뭐냐고 했다.


 엄마는 "너를 대학 보냈으면 동생들 공부를 더 잘 시켰을 텐데. 내가 머리를 잘못 썼어."라고

 말했다. 엄마에겐 난 동생들 공부시키는 존잰가. 내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는데도 엄마에겐 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조금도 없단 말인가.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너를 공부시켰으면 네가 잘 살 수 있었을 건데."라는 말인데. 이 한 마디면 그동안 내가 참아왔던 모든 아픔이 사라질 것인데.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딱딱한 철판이 생겨나 가슴 앞 막았다. '동생들에겐 엄마가 머리를  잘못 쓴 게 맞아. 내겐 마음을 잘못 쓴 거라고.' 나는 엄마에게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이 말을 했더라면 철판이 가슴을 가로막지 않았을까.


"엄마는 내가 좀 더 편히 살거나 하고 싶은 것 하며 사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야. 나보다 공부 더 많이 한 동생들 공부 걱정이나 하고." "엄마는 내게 마음을 잘못 쓴 거라고." 라며 엄마에게 화를 낼 수 있는 나라면 우울과 불안이 내 삶의 기초가 되었을 리가 없다. 가슴에 딱딱한 철판이 생길 까닭도 없다. 내 삶에서 우울과 불안을 없애고, 새롭게 살아보려는데. 딱딱한 철판이 가슴 앞을 가로막다니.


여러 날 후,  여동생이 연락해왔다. "언니, ㅇㅇ이  생각해보니 알겠더라. ㅇㅇ이 고삼 때 그때보다 상황이 나쁘지 않은데도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더라. 언니는 정말 힘들었겠어. 고마워, "그 아래 여동생도 전화해서 말했다. 고맙다고.


월급봉투 째 아버지께 갖다 드렸기 때문에 동생들에게 과자 한 봉지 사주지 못했다. 아마도 동생들은

동생들 대로 내게 서운했을 것이다. 직장 다니며 월급을 받은 누나, 언니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니. 그 당시 나는 동생들에겐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한 것을 몰랐으니까.


가슴 앞을 가로막는 철판을 둔 채 살 수는 없었다. 드라마 치료를 했다. 드라마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내 가슴을 막고 있던  철판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와 더불어 엄마에게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을 기회도 영영 사라졌다. 나는 엄마가 좋아할 말만 하기로 했다.

 

치매로 단기 기억은 물론 어릴 때의 기억조차 흐릿해져가고 있는 아흔이 넘은 노인을 붙들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보다 더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엄마에게 말이다. 그나마 늘그막에 아들 복이 있으니 다행이다. 둘째 남동생이 엄마와 함께 살면서 매끼 식사는 물론 약을 챙겨드린다.


"엄마, 널 공부시켰으면 네가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을 안 해줘도 괜찮아. 내가  내게 "널 공부시켰으면 네가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말을 해주는 엄마가 되기로 했으니까. "엄마, 우리 이 세상에 소풍 온 거 맞지. 소풍이 별 거야.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집에 돌아가 거. 그게 소풍인데. 나 너무 요란 떨었나 봐. 한 가지 구경거리 놓쳤다고 실망할 필요 없잖아. 세상에 구경거리 많고 많은데. 엄마, 지금 세상 좋아 나 하고 싶은 거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엄마도 세상 구경 실컷 해. 나중에 억울해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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