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교실에서
어느 날 91세 노인 교육생이 다른 교육생에게 책 두 권을 넘겨주고 있었다. 웬 책이냐고 물었다. 91세 노인 교육생이 책을 빌려서 보고 돌려준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작년이었다. 수업시간에 교육부에서 낸 성인문해교과서(초등과정) 지혜의 나무 12를 들고
"이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어 본 적 있습니까?"
아무도 다른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리라 예상했다. 내가 이렇게 예상한 이유는 이분들은 내용을 이해할 생각은 전혀 없고 글자 한 자 한 자 아는 것에 마음이 가있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혜의 나무는 12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지혜의 나무 12는 초등학교 교재 중 가장 높은 단계이지만, 보통 5분, 길게 잡아 10분 이내에 다 읽을 수 있는 내용뿐이다. 그러니 이전 11단계를 공부했더라도 그 내용이 얼마나 많겠는가. 좀 안타깝고 답답했다.
나는 이분들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노인교육생들은 나의 수업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쉽다 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렵다 했다. 이때는 이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교육생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난 뒤 그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른 수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생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가르친다고 안 나왔다.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렵다고 안 나왔다. 이분들이 원하는 수업 방식은 강사가 앞에서 교재를 읽으면 교육생이 따라 읽고 약간 설명해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받아쓰기를 많이 하는 것이다. 받아쓰기를 한 다음에는 매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받아쓰기를 하는 동안 한 사람 한 사람 쓰는 것을 들여다본다. 어떨 때는 받아 쓸 글자를 불러 주고는 한 사람에게 개인 과외처럼 발음과 글자의 원리를 설명해 준다.
한 교육생은 글자를 대부분 읽을 수 있지만 나는 못한다며 받아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 교육생 옆에 서서 한 글자 쓰게 하고 한 글자 쓰면 또 한 글자 쓰게 했다. 그랬더니 내가 옆에 있으면 쓰고 옆에 없으면 쓰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받아쓰는 것이 좀 늘었다.
또 교육생들이 자주 틀리게 쓰는 것을 파악해 두었다가 칠판에 쓰고 이 글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글자와 발음이 어떻게 다른 지와 발음 규칙도 설명해 준다.
교육생마다 다른 데서 막히기 때문에 그걸 알아서 하나하나 해결해 줘야 빨리 느는데, 어떤 교육생은 기다리다가 지쳐서 화가 난다고 했다.
이럴 때 91세 노인교육생은 교재를 읽거나 받아쓰기하기 위해 줄 그어놓은 낱말들을 적는다. 받아쓰기할 때도 글자 쓰는 속도가 달라 빨리 쓴 사람은 기다려야 한다.
이때 91세 노인교육생은 받아쓰기 한 글자를 두 번 세 번 다시 적으면서 기다린다. 화가 난다는 분에게 누누이 말했었다. 내가 다른 교육생에게 설명을 해줄 때는 책을 읽거나 쓰기를 하면 된다고.
나는 그림책을 여러 권 빌렸다. 그리고 수업 시작할 때 한 권씩 읽어라고 했다. 나는 각 교육생들에게 일일이 소리 내어 읽어보라 하고 모르는 글자를 가르쳐주었다. 사실 여기 노인교육생만이 아니라 나도 '으'와 '어' 발음을 제대로 구별해서 발음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글자를 제대로 쓸 수 없다. 받아쓰기 할 때 내가 거울을 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몇몇 교육생은 그울이라 따라 말하고 그울로 쓰는 식이다.
그림책을 읽다가 내가 옆에 없을 때는 모르는 글자를 공책에 적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책 읽지 말고 교재만 공부하자는 분이 있었다. 그분에게는 교재를 읽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을 교재를 읽지 않고 그림책을 읽었다.
91세 교육생분은 책을 읽는 속도가 다른 교육생에 비해 좀 빨랐다.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도 높았다. 그래서 집에 있는 이솝우화집을 들고 갔다. 수업 시간에 이 책을 좀 읽어 보라고 했다. 어려우면 그만두고 다시 그림책을 읽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날 시간이 좀 지난 후 91세 교육생이 말했다.
"선생님, 이 책 너무 재미있어요. 집에 가서 마저 읽고 싶어요. 빌려 줄 수 있어요?"
91세 교육생이 이솝우화집을 빌려갔다. 다음 수업 때였다. 이 책 며칠 더 빌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너무 재미있어 나중에 읽으려고 베껴 쓰고 있다고. 그리고 또 다음 수업 때였다.
"선생님, 이 책 팔 수 있어요. 너무 재미있어 사고 싶어요."
나는 이 책은 이미 읽었으니, 다른 책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중고 큰 글자책 단편 소설집을 사서 주었다. 물론 책값을 받았다. 다음 수업 때 91 세 노인교육생은 단편 소설집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서두에 말한, 91 세 노인이 다른 교육생에게 책을 빌려보고 돌려주는 장면을 본 것은 이로부터 몇 주가 지난 때였다.
내가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노인 교육생들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랐는데, 91세 노인교육생에게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다. 조만간 또 한 교육생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될 것 같다. 어느 날 그림책을 읽는 시간에 그 교육생에게 슬그머니 이솝 우화 책을 주며 말했다.
"이 책 한 번 읽어보세요. 어려우면 그림책을 읽으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고 읽어보세요."
이 분은 양치기 소년을 읽고 재미있다고 했다. 수업 때마다 황금알을 낳는 암탉 등 한두 개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조만간 책 읽는 즐거움에 빠질 것 같은 이분은 기다리다가 지쳐 화가 났다는 바로 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