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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수 Jul 26. 2022

눈알을 잘못 붙였네요.

제대로 만든 것은 어떤 것일까

  노인복지관에서 스토리텔링 생태공예 수업을 할 때다. 한 어르신이 토끼의  눈알을 뒤집어 붙였다. 옆자리 어르신이 "눈알을 잘못 붙였네요."라고  하면서 눈알을 떼서  다시 붙이라고 했다. 눈알을 뒤집어 붙인 어르신  했다. "보기 싫은   많심더. 그냥 둘끼라예."  옆자리  어르신은  못내 아쉬워했다. "눈알을 뒤로 붙이면  안 예쁜데."라며.

  

눈알을 뒤집어 붙인 어르신은  예쁘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토끼를 예쁘게 만들기 위해 눈알을 바로 붙이는 것과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눈을 뒤집어 붙이는 것은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일이 아닌데.  잘못 붙였다는 말을 들은 어르신은  황당했을 것 같다. 가치 기준이  다를 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닌데.

  

 나는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됩니다.  잘  만든 작품도  잘못 만든 작품도 없습니다. 내 마음이 시킨 대로  만든 것이 좋은 작품입니다. 예쁘게 표현하든 예쁘지 않지 않게 표현하든.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지만,  이 작품은 맘대로 할 수 있요. 맘대로 해 봅시다." 어르신들은   "와~" 하며 좋아했다.


 "눈알을 뒤집어 붙이셨군요.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묻기 쉽지 않다. 눈알을 뒤집어 붙이는 일 상식 밖 일이라서기보다, 동자가 보여야 제대로  된  눈이라는  우리의 선입견 때문이다.


토끼를 예쁘게 만들기  위해  눈동자가 보이게 눈알을 붙이는 것과 세상에  보기  싫은  것이  있는  사람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눈알을 뒤집어  붙이는 것의 결은 같다. 둘 다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모습 다르지만  제대로 만든 것이다.


 나는  발표를 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국민학교 때 통지표(성적표)에 매년 '매우 소심함'이라고 적혀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유달리 자리를 많이 비우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조용하게 자습하라고 다. 나는 조용하게 자습을 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떠들기 시작했다. 떠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없는 일을 지어내면서 선생님의 흉보는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없을 때 떠들고 흉을 보는 아이들은 반장을 비롯한 반에서 세력이 있는 애들이었다. 선생님이 떠드는 아이 이름을 칠판에 적으라고 한 아이는 반장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반장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가 떠들어도 안 적을 거라는 걸 아셨기 때문에. 약간 지능이 낮은  아이에게 시켰다. 그 아이는 떠드는 아이들 이름을 모두 적었다. 선생님이 오실 때쯤이면 칠판에는 아이들 이름이 남아있지 않았다. 반장이나 이름 적힌 애들이 다 지워버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공부를 꽤 잘했기 때문에 내 소심한 성격은 묻혔다. 이 아이들과 놀기도 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나는 무리에 속에 있으면서도 그 무리 속에 속하지 못했다. 나는 아웃사이더, 관찰자였다.


그 애들은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 흉을 보고 웃고 떠들었다.  나는 그 애들의 행동을 '나쁜 짓.'으로 규정했다. 그 애들의 그런 행동에  동참할  수 없었고  교실이  떠나가도록  떠드는 것이 싫었지만.  조용하라는 말을 못 했다.


 나의 욕구를 좀 더 표현하게 해 준  계기가 있다. 숲체험  수업을 하기 위해 사문진 나루터에 갔을 때였다. 퍼걸러 아래 테이블에서 스토리텔링 생태공예 수업을 해야 했기에,  테이블을 찜하러 갔다. 멀리서 보니, 한 테이블에는 이미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머지 테이블을 찜하기 위해 서둘러 갔다.


두 사람은 중년의 부부였다. 중년의 남편이 중년의 아내를 아이 나무라듯 나무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이도 그렇게 나무라면 안 되는데. 남편의 말투가 듣기에 민망했다.  


내가 다가가도, 남편의 태도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중년의 아내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안절부절 앉아있었다. 흘깃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과  내 눈길이 마주쳤다. 민망함이 그득한 그녀의 눈빛과는 달리, 중년의 남편은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당당했다. 빈 테이블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중년 여성인 아내 남편이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가 남편의 더 큰 화를 불러올 것 같아, 남편의 부당한 행동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착한 아이 병이 있었고, 고상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싸우면 큰소리치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남편이 나무라는 소리를 들으며. 쪼그라져 있는 여성이 등장할 때, 안 됐다는 감정이 일어났는데.  눈앞의 쪼그라진 중년 여성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사람들이 나를 잘못된 방식으로 대할 때,  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을,  그럴듯한  신념 속에 감추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알을 뒤집어 붙이신 어르신처럼, 요즘엔  내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장소에 상관하지 않고 내 목소리를 낸다.


남편의 화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사문진 나루터의 중년 여성. 품격 있는 목소리가 아니면 어떤가.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좀 거칠거나, 큰 소리를 낸들.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는 일이라 나쁜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나는 고분고분 공손함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일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단호하게 "그만하시오."란 말을 하려다, 좀 거친 말이 튀어나와도 어쩌겠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공손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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