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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우리를 낫게 하는 마법의 언어

나의 중년은 청춘보다 아름답다 중 호프맨 작가의 예술과 친해지세요를 읽고

by 할수 최정희

'음악은 마법의 언어입니다. 슬픔을 더 슬프게 해 주고 기쁨을 더 기쁘게 해 주기 때문이지요. 언제부터인가 슬픔을 삭이려고 하였지요. 음악을 들어서 더 슬퍼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위 문장들은 나의 중년은 청춘보다 아름답다의 공동저자인 호프맨 작가의 글이다. 나도 음악은 우리를 더 웃게도 하고 더 울게도 하는 마법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호프맨 작가처럼 나도 음악을 들으며 더 슬퍼지고 싶지 않아서 음악을 멀리하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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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를 비롯한 우리 가락을 들을 때면 빨래 쥐어짜는 듯 음악이 내 심장을 쥐어짰다. 클래식 음악은 날이 얇은 회칼이 되어 심장을 저몄다. 가요는 거센 풍랑처럼 나를 흔들어댔다.


나는 음악에게서 멀리 달아났다. 주사 맞기가 두려워 울며 냅다 달아나는 아이처럼 말이다. 아이는 결국 엄마나 아빠 손에 이끌려와 주사를 맞지 않을 수 없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 위해 우리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 일 수는 없다.


호프맨 작가는 말한다. 음악은 무지개 같은 요술방망이이고 지니의 마법사라고. 아무리 음악이 마법의 힘을 지녔을지라도 음악이 먼저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내가 음악에게로 다가갔을 때 음악은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며 마법의 손수건으로 나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중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인생의 재무제표를 살펴보았다. 이득이라곤 전혀 없었다.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갚아야 하는 텅장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참담하였다. 내가 있는 곳은 더 내려가서는 안 되는 밑바닥이었다.


울면서, 내가 올라가고 싶은 지점이 어딘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올라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나 스스로 해낼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줄 사람도 없었거니와 내가 스스로 올라가야 하는 거였다.


나는 나를 구원해 줄 그 무엇으로 음악을 선택했다. 음악을 멀리 했지만, 음악이 가지고 있는 마법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임재범의 비상과 태연의 날개를 골랐다. 임재범의 비상은 자기만의 골방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열망이 담긴 노래다.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나도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노래는 골방에 갇혀 있는 나를 더 아프게 했지만, 난 알았다. 비상이란 노래가 내 골방의 벽을 허물고 나를 골방에서 꺼내 줄 거란 걸. 내가 곧 괜찮아질 거란 걸. 나는 날마다 울면서 날개를 퍼덕거렸다. 내 날개는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어린 새의 날개 같았다. 이런 날개로 하늘로 날아오르려면 백 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평생 날아오르지 못할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태연의 날개를 크게 틀어놓았다. 태연의 노래는 한 번도 제대로 날지 못한 내 두 날개 새롭게 펼쳐봐라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믿고 내 안의 나를 넘어서서 날개를 펼치면 빛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새 세상을 맞을 거라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나는 골방 속에 그냥 머물고 싶은 마음과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사이를 왕복하면서 꽤 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난 혼자가 아니었다. 음악이 함께 있었다. 내가 음악에게로 갔더니, 음악은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나를 받쳐주었다. 내 심장을 비틀어 짜던 음악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음악의 칼은 무디어져 갔고 음악이 일으킨 풍랑도 차즘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면서 임재범의 비상과 태연의 날개를 다시 들어보았다. 그때처럼 눈물이 흐르지도 않고 가슴이 먹먹하지도 않다. 그리고 절실한 그 무엇이 없다. 음악은 매우 쓴 커피인 에스프레소 위에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어내는 아포카토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음악이 달리 들리는 것은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곳에서 듣기 때문이다.


골방에서 음악을 들을 땐, 우리는 음악의 맛 중 쓴 에스프레소 맛을 강하게 느낀다. 바깥 세상에서 들을 땐 우리는 달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이 더 잘 느낀다. 우리가 골방에 잠시 있는 것을 좋지 않다고 할 수 없다. 바깥세상에서만 있는 것도 좋다고 할 수 없다. 이쪽 저쪽에서 모두 살아보는 것을 나는 나름 좋다고 생각한다. 음악의 서로 다른 맛을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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